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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무모한 것은 현실입니다. 그래서 도전합니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 용산참사 유가족, 밀양 송전탑 농성 주민, 쌍용차 해고 노동자,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소속 목사, 녹색당원까지.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들이 지난 2일 한 자리에 모였다. 이 곳은 경상북도 '경주'다.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지방의 한 도시, 여당 텃밭으로 분류되는 이곳에 이들이 전국에서 찾아온 이유는 하나,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권영국 변호사 때문이다. 이들은 왜 경주에 왔을까.
용산참사 '경찰vs변호사'…경주에서 재회
'거리의 변호사'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동안 누군가의 변호사로 거리에 섰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걸고 나왔다.
권 변호사의 출마는 시작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경주의 여당 후보는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다. 김 후보는 지난 2009년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철거민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한, 용산참사 당시 진압 책임자였고, 권 변호사는 철거민 유가족을 대리한 변호사였다. 이들이 7년여만에 경주에서 다시 만났다. 권 변호사는 지난 2월21일 서울 용산구의 용산참사 현장에서 출마를 선언했다.
지난 15년간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권 변호사의 출마 선언은 그와 가까운 주변인들에게도 의외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지난 2014년부터 출마를 염두에 뒀다.
"오늘로써 나는 천민 자본과 이를 옹호하는 권력의 카르텔이 너무도 강고한 이 땅에서 노동자들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기로 한다…판결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보겠다는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다면 이제 털어버리자…법이 정의 수호를 위한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통치를 관철하는 제도적 수단임을 드러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난 2014년 11월 그는 자신의 SNS에 '사법정의의 대한 미련을 버리며'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대법원이 쌍용차 회계조작 정리해고 사건에 대해, 153명의 정리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회사의 손을 들어준 날이었다. 권 변호사는 이 사건의 대리인이었다. 이날 이후 그에게 법은 더이상 정의가 아니다.
"이날 정치적 세력 관계가 바로 세워지지 못하면, 사법정의도 하나의 제도로써 우리가 추구했던 정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법적 정의라는 것도 인적 구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사법의 이름으로 정의가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죠."
그래서 그는 '진흙탕'이라는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 그 시작이 경주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를 보냈던 곳이기도 해요. 경주 안강에 있는 풍산금속 안강공장에서 일을 했었어요. 청년기 가장 치열하게 싸움을 했던 곳이죠. 이곳에서 일련의 사건들 이후 책임있는 인생을 살기위해 노력해왔어요. 이제 제 인생의 3막인 정치 인생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인연이 깊은 곳이죠."
권 변호사는 20대 서울대 졸업 후 병역특례로 풍산금속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노동조합 설립과 공장 내 화약폭발 사고로 사망한 직원의 유가족들에게 회사가 보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다 해고당하고, 복직 투쟁을 하다 구속됐다. 이곳에서 그의 노동운동이 시작했고, 구속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곳인 셈이다.
"외연 확장 새판 짜기…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정치 참여를 위한 쉬운 길도 있다. 기존 정당에 편입해 비례대표나 이길 가능성이 높은 지역의 공천을 받으면 손쉽게 여의도 입성이 가능하다. 야당 입장에서도 권 변호사의 이력은 꽤 매력적일 법 하다. 하지만 그는 '여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경주를 택했다. 첫 번째 이유는 김 후보였지만,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는 목표가 컸다.
"왜 사서 고생이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을 바꾸려면 완고한 대구·경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곳을 택했어요. 경주가 바뀌어야 대한민국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치 참여의 직접적인 동기로 '야당의 무력함'을 꼽았다. 지금의 정치 체계 속에서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보수양당 체제가 우리 정치 현실을 후퇴시키고 있고, 지금의 진보정당들로는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오히려 외부에서 자극을 주는 방식이 새롭게 판을 짜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기존과 원칙을 제대로 세워, 내부의 힘은 모아 묶고, 외연을 확장하는 판짜기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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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권 변호사가 출마를 선언하고 경주로 내려오자, 경주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했을 무소속 후보를 위해 전국에서 지지선언이 이어졌다. 전국의 변호사와 교수, 연구자 300여명이 공식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혔다. 동료 변호사들과 그의 전 의뢰인들은 주말이면 내려와 선거운동을 돕고 있다.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이후 갈라졌던 운동권도 경주에서는 하나로 뭉쳤다. 밀양 송전탑 사건으로 인연을 맺은 녹색당은 자신의 당 후보도 아닌 이를 위해 선거 지원에 나섰다. 현재 경주에서는 지역과 분야를 넘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무소속' 후보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는 보기드문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기존 정당에 속했다면 보이지 않았을 사람들이 여러가지 색깔로 들어와있어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죠. 그동안 갈라져있고, 배척하기도 했던 이들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꿈꿨던 모습이기도 해요."
그는 '노동자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주권자이고 권력은 원래 우리의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찾아와야 하지 않을까요. 왜 항상 광장에서 외쳐야 하나요. 기존 정치가 대안이 아니라면 우리가 직접 대안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지역 산업·핵 문제 심각…내 말에 책임질 것"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만큼 지역 현안 파악과 대안 제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권 변호사는 "경주에는 대한민국의 문제가 응축돼있다"고 봤다.
"경주는 크게 산업단지와 농어촌, 중소상인들로 이뤄져있어요. 이는 곧 비정규직 등 노동자 문제, 전통시장 등 기존 상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의 문제로 모아져요. 그동안 취약했던 지역 특산물을 특성화하고, 문화관광 산업을 위한 콘텐츠 확보 등이 필요하다고 보고 고민하고 있어요. 또 월성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수명을 다 했는데도 연장해서 사용하고 있죠. 방사성폐기물처리장까지 들어왔어요. 방사선 피폭 문제가 심각해요."
권 변호사는 특히 핵 문제를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목했다. 실제 지난해 11월 월성 지역 주민 40명이 소변 검사를 했는데, 모든 주민들에게서 방사능 물질인 삼중수소가 검출됐다. 이 중에는 5세부터 19세까지 9명의 아동과 청소년도 있다. 삼중수소는 월성원전과 같은 중수로형 원전에서 많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방사성 물질인데, 장기적으로 노출되면 백혈병이나 암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처음 경주에 내려왔을 때는 다들 '뭐지'라는 표정으로 바라봤었어요. 용산참사의 주범을 잡으러 왔다는 말이 퍼지자 '그럼 너는 뭐냐'는 질문도 받았고요. 요즘에는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늘었고, '똑똑한 변호사가 내려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많이 달라졌죠. 정치를 계속 한다면 그 기반은 경주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벌써 약속한 것들이 있어요."
무소속 후보에게 경주는 험지다. 지난 수십년간 여당 국회의원만을 배출해왔다. 주변에서 무모하다고 말리는게 당연하다.
"우리 현실이 더 무모하지 않나요. 사람과 상관없이 어떤 당에서 공천을 받았다고 표를 주는 지금의 현실이 더 무모하다고 생각해요. 도전하지 않는데 현실이 바뀔까요. 나보다 더 무모한 것은 현실이에요. 그래서 도전합니다. 험지에서 출마했다는 것 때문에 측은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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