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건의 진행경과

원고가 1명, 피고가 2명인 어떤 민사소송 사건의 진행 중에 법원의 주도하에 위 소송당사자들 사이에 조정이 성립하였습니다. 그 후 피고측이 조정합의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원고는 위 조정이 허용한 대로 조정합의를 해제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고가 2명의 피고 중 1명에 대해서만 해제의 통지를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위 조정합의 해제를 전제로 한 새로운 분쟁이 발생하였고 다시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민법은 당사자의 일방 또는 쌍방이 수인인 경우에 계약의 해제는 그 전원으로부터 또는 전원에 대하여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제547조 제1항), 이는 하나의 계약 중 일부 당사자에 대한 권리의무만 소멸시키는 것은 권리의무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규정입니다.

이에 새로이 발생한 위 분쟁의 소송대리인인 저는, 민법 제547조 제1항을 근거로 조정합의에 대한 위 해제통지가 부적법하여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주장하였지만, 위 사건의 제1, 2심은 위 해제통지는 조정합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중 일부 조정조항에 대한 것이라는 이유로 위 주장을 배척하였습니다. 즉, 계약의 일부 권리의무조항에 대한 독립적인 해제라는 개념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1, 2심의 위 해석은 민법 제547조 제1항의 명문규정에 반할 뿐만 아니라 조정합의의 불가분성에도 반하는 해석입니다. 즉, 모든 조정조항은 그 하나라도 누락된 상태에서는 조정합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제1, 2심 판결은 다른 조정조항만으로도 조정합의가 유효하게 존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에 저는 위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최종심인 법원에 상고하여 제1, 2심 판결의 위법성을 다투었으나, 대법원은 대법원에 사건이 접수된 지 3개월 만에 “원심판결 및 상고이유서와 이 사건 기록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상고인의 상고이유에 관한 주장은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 제4조 제1항 각 호에 정한 사유를 포함하지 아니하거나 이유가 없다고 인정되므로, 같은 법 제5조에 의하여 상고를 기각하기로 하여,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라는 판에 박힌 판결이유로써 이를 기각하였습니다.

결국, 법률심인 대법원으로부터 법률의 해석에 관한 판결이유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고 사건이 종료된 것입니다.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 추진

저는 그 동안 상대적으로 많은 상고심 파기환송 판결을 받아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대법원으로부터 파기환송을 받는 일이 드뭅니다. 그러나 잘못된 판결이라고 생각되는 하급심 판결의 빈도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수는 3만 8000건이 넘고, 이를 재판을 하는 대법관수 12명으로 나누면 대법관 1사람당 한 해에 배당되는 사건수는 3100건을 넘습니다. 대법관이 1년 365일을 모두 일한다고 했을 때 하루에 8.6건을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법원의 업무가 과중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대법원은 2015년 이후 대대적으로 상고법원 설치를 홍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홍보의 내용은 “상고법원의 더 나은 사법서비스, 공정한 사회를 향한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다 신속하고 충실한 재판으로 다가갑니다.”라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대법원이 그동안 신속하고 충실한 재판을 하지 못하였고, 양질의 사법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였다는 반성으로도 보여집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대법원의 하급심 판결에 대한 감시기능, 나아가 하급심 판사들의 업무처리의 적정성에 대한 감독기능이 마비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중앙 통치기구의 권위가 무너지면 지방의 하급관리들의 전횡이 극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목격해 왔습니다. 물론 판사들의 사명감을 믿어야 하겠지만, 무조건 판사들의 사명감에만 기대야 하는 시스템이 좋은 시스템이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어쨌든 대법원 기능의 정상화가 시급합니다.

◇하급심 강화와의 관련성

대법원은 하급심 강화 방안을 부단히 강구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급심에서 충실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오히려 대법원의 존재가 하급심의 역할에 방해요소가 됩니다. 하급심은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에 책임감 있는 판결을 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하급심 재판부는 판결을 내릴 당시까지도 자신이 작성한 판결문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는지, 스스로 “우리는 이렇게 판단했으니 납득하지 못하면 대법원에 상고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급심 또한 그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법조 브로커들은 소송당사자들에게 법관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교제비가 필요하다는 말로 당사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냅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법관들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보도가 터져 나옵니다. 게다가 당사자들로서는, 어떤 때에는 변호사조차도 납득하기 힘든 판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법원을 믿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결국 잘못된 판결은 그 상급심에서 한 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시스템의 구축이 사법신뢰도의 기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