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 디자이너

현장은 한 아이의 생명을 잔혹하게 앗아간 곳이라고 보기엔 평범해 보였다. 주인이 떠난 집에 혼자 남은 개가 방을 돌아다니며 어지럽힌 흔적이 남아 있었고, 오랫동안 치우지 않은 개의 배설물과 바닥에 뒤엉켜 있는 옷가지로 좀 어수선했다. 쓰레기통에는 가정형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메모가 담긴 종이도 발견됐다. 서랍장 한편에는 간결하게 정리된 아이의 옷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이를 위해 준비해 놓은 아기침대는 혼자 덩그러니 남아 제자리를 지켰다. 육안으로는 쉽사리 학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현장이었다.

태어난 지 3개월도 안 된 '젖먹이' 딸을 부모가 상습적으로 학대하고 고의로 2차례 바닥에 떨어뜨려 살해한 사건, 이른바 '부천 영아학대' 사건의 현장검증은 이렇게 시작됐다.

"궁금하면 가지고 온다"..증거는 사건 해결할 열쇠

영아학대 사건의 경우 '증거확보'가 사건을 해결할 가장 중요한 열쇠다.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받은 피해사실을 진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학대의 대부분이 집 내부에서 일어나 증거 훼손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이가 이미 숨졌다면 피의자인 부모의 진술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당시 숨진 아이의 부모는 경찰 조사에서 "분유를 잘 먹지 않고 계속 울어 때렸다"며 학대와 살인의 고의를 부정했다. 현장에서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잡아야 하는 사건이었다. 미세증거를 찾는 과학수사기법이 필요했다.

현장을 둘러보던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감정관들은 빨래 건조대 밑에 널브러져 있던 아이 옷과 부모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면바지를 발견했다. 육안으로는 혈흔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증거물로 가져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기도 했다.

이럴 때 정답은 하나다. "궁금하면 가지고 온다." 혹시 혈흔 반응이 있을까 해서 아이 침대의 천도 찢어 오고 배냇저고리 2개, 짱구베개 등 여러 물품을 수거해왔다.

감정관들은 혈흔을 찾기 위해 루미놀 반응시험을 했다. 주로 살인이나 폭행 현장에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혈흔을 찾을 때 사용되는 방법으로, 이번 경우에는 물로 대충 씻어버린 옷에서도 발견이 됐다. 지시약의 일종인 루미놀은 혈액의 헤민(헴·heme)과 반응하여 푸르스름한 형광색을 나타내는데, 이 반응이 우리가 찾는 혈흔이다.

'루미놀 반응' 시험..아버지 옷에서 아이의 혈흔 발견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했던 수면바지의 17개 부위를 채취했더니 16개에서 인혈반응이 나왔다. 그중 15개의 DNA를 분석한 결과 아이의 것과 일치했다. 배냇저고리의 6개 부위, 작은 방에 놓여 있었던 짱구베개의 8개 부위에서도 아이의 혈흔이 발견됐다. 

/이지혜 디자이너

이때 감정관은 어른이 입는 수면바지에 아이가 흘린 피의 흔적에 주목했다. 여러 군데서 발견된 혈흔 흔적은 3개월간 아이에게 가해진 폭행의 정도를 말해준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을 심리한 법원 역시 아이가 느꼈을 고통의 흔적을 판결문에 담아 놓았다. 손톱으로 할퀸 아의의 머리, 몸통 전반과 가슴, 옆구리, 엉덩이 등에 발견된 피부까짐, 이마와 눈구석의 멍자국, 눈꺼풀 부분의 출혈, 귀 안의 상처, 골절된 팔, 부러진 갈비뼈….

아이는 아버지 A씨(23)에 의해 높은 곳에서 바닥에 두 번이나 떨어져 피를 흘리며 자지러지게 울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최소한의 응급조치도 받지 못한 채 아이는 숨을 거뒀고, 부모는 사망 사실을 확인한 후 죄를 덮기에 바빴다.

피가 고스란히 묻으면 딱딱해져서 누가 봐도 혈흔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현장검증 당시 혈흔의 흔적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은 피의자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닦아냈음을 짐작케 한다. 감정관은 핏자국을 찾기 위해 하나의 감정물에서 여러 부위를 채취한 샘플을 정밀 감정했다.

법원에 제출한 감정서에는 증거물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혈흔반응 실험을 했던 전후의 사진을 첨부했다. 주위가 깜깜해야 가능한 루미놀 반응시험 과정은 남겨진 혈흔의 양이 적을수록 찰나의 시간만 반짝인다. 핏자국들이 루미놀과 반응해 아주 잠깐 그 위치를 알리고 사라진다. 그래서 이 현상을 카메라에 담기란 쉽지 않다.

'DNA 분석결과' 법원서 유죄 증거 채택

감정관들이 선택한 방법은 카메라의 조리개를 오랜 시간 동안 열어 놓는 벌브촬영이었다. 카메라 조리갯값을 최대한 줄이며 셔터속도를 늘려 찍는 기법으로 카메라 찍는 동안 빛들의 움직임을 담아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촬영한 혈흔반응의 사진을 기존의 수면바지 위에 겹치는 방식으로 감정물 사진을 만들었고 아이 부모의 죄를 뒷받침할 증거가 됐다.

종이에 간장(왼쪽)과 혈흔(오른쪽)을 묻혀 주변을 어둡게 한 후 루미놀 용액 반응 실험을 했더니 혈흔에서 푸르스름한 형광색이 나타났다. /자료제공=대검찰청 과학수사부

휴대폰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 결과도 한 몫 했다. A씨는 아이가 숨진 것을 알고도 곧바로 병원에 옮기지 않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망 확인 시점에 관해 거짓 진술을 했다가 모바일분석팀에 의해 인터넷 검색 시간이 드러나자 곧바로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죄를 부인하던 부모는 결국 법원의 심판을 받았다. 지난 8월12일 인천지법 부천지원 형사1부(이언학 부장판사)는 살인 및 아동복지법상 상습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된 아버지 A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또 남편의 학대행위를 방치한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아내 B씨(23)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어린 부모가 자신들이 만들어낸 소중한 생명의 빛을 스스로 꺼트린 비극적인 사안"이라며 당시 아이가 처한 상황을 판결문에 표현했다.

"단순히 철부지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나도 참혹했다. 스스로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생후 80일의 피해자가 온 몸에 멍이 들고, 여러 곳의 뼈가 부러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부모를 향해 살려달라고 우는 것 밖에 없었다. 피해자는 두개골이 함몰되고, 곳곳의 뼈가 부러지고, 온 몸에 멍이 든 상태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검찰은 "형이 너무 가볍다"며, 피고인들은 "형이 무겁다"며 모두 항소했다.

☞루미놀 용액을 이용한 혈흔반응 원리

범인이 증거를 숨기려고 깨끗이 청소했을 경우 혈흔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증거를 찾기 위해 혈흔검사를 한다. 범죄 과학 수사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우리도 루미놀 반응 실험세트를 구입해 간단한 혈흔검사를 해볼 수 있다. 손가락을 소독한 후 혈흔을 채취해 A4용지에 혈흔을 묻힌 후, 혈흔 위에 루미놀 용액을 분무한 다음 주변을 어둡게 해서 반응을 관찰한다. 혈액 속의 헴 성분이 과산화수소를 분해하면서 산소가 발생하고, 산소는 루미놀을 산화시켜 파란색 발광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