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
"범죄모의 사실이 없었음에도 공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건 당사자가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최말단에서 단순송금 업무만을 맡았던 이 당사자는 1,2심에서의 소극적 대응으로 인해 무죄여부를 적극 다투지도 못한 채 과도한 형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7월 아르바이트 모집 사이트에 올라온 구인공고를 보고 한 대부업체에 취직을 했다. 40대 초반임에도 당시까지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A씨는 회사의 지시를 받아 현금을 특정계좌로 이체하는 일을 하는 대가로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A씨는 취직한 후 한달간 회사가 지목한 인물로부터 5억3900여만원을 넘겨받아 회사가 지명한 은행계좌에 입금했고 그 대가로 약 200만원을 수령했다. 하지만 단순 심부름에 불과한 업무에 비해 한 달 월급이 너무 많다는 점에 이상함을 느꼈던 A씨는 이내 회사를 그만 뒀다고 한다.
하지만 A씨는 이후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1·2심에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과 형법상 사기죄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단순한 회사 자금이체 심부름이라고 여겼던 A씨의 일은 사실상 보이스피싱 조직의 말단에 해당하는 '송금책'이었던 것이다.
이 조직은 총책 B씨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저리대출로 대환을 해주겠다는 등 명목으로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들이 '인출책'의 계좌로 돈을 송금하도록 조종했다. 이 '인출책'은 본인계좌로 들어온 금액을 현금으로 인출해 '송금책'에게 전달했고 '송금책'은 이 금액을 보이스피싱 총책이 지명하는 계좌로 이체하는 단순업무만 맡았다. A씨는 바로 이 송금책이었다는 얘기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A씨를 다른 인출책, 송금책과 함께 공범으로 묶어 실형을 선고했다. 특히 A씨에 대해 2심 재판부는 "A씨가 가담한 전화금융사기 범죄는 …(중략)…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적·조직적 범행일 뿐 아니라 피해범위가 무차별적이고 방대하며 엄벌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A씨가 최초 범행계획단계에서부터 공모해 참가했다고 봤다는 얘기다.
A씨 측은 "당초 1·2심의 사실심 단계에서부터 무죄를 적극 주장했어야 하는데 낮은 형량 또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다는 변호사의 제안에 검찰이 주장하는 혐의를 그대로 인정했고 피해자를 대상으로 위자료 명목으로 공탁금을 내기도 했다"며 "제대로 처음 대응하지 못한 결과 억울하게 형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죄를 저지른 범인에게 형을 부과하려면 1단계로 범인의 행위가 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해야 하고 2단계로 해당범죄의 위법성을 따져야 하며 3단계로 마지막으로 해당 범행에 대해 책임을 지울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이 3가지 요건이 모두 갖춰져야만 피고인에게 형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게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다.
하지만 A씨측 주장대로라면 1단계인 구성요건의 핵심인 '범행하고자 하는 고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A씨는 단지 당시 무직자로서 곤궁한 상태에서 대부업체에 취직했을 뿐 보이스피싱 적극 가담할 의사가 없었고 조직범죄에 가담한다는 점을 알았더라면 당초 해당 대부업체에 취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A씨에게 실형이 떨어진 사기죄 혐의에 대해서도 기망행위(속이는 행위)와 피해자의 재산처분간의 인과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를 속인 이는 해당조직의 '총책'이었지 A씨가 아니었다. A씨는 단순 심부름만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A씨 측은 "처음부터 무죄를 적극 다퉜어야 하는데 초기 미숙한 대응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혐의를 그대로 인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며 "이미 형기가 절반 이상 지났고 법률심인 대법원 판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억울함은 제대로 풀고 싶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달 말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한 변호사는 "사실심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안타까운 사례"라며 "정작 범행 전반을 기획한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은 잡지도 못한 채 A씨와 같은 송금책이나 인출책 등 '깃털'들만 잡아서 일괄적으로 공범으로 몰아가는 검찰의 기소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