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만날거라고요. 만나기 싫다고."

이씨는 짜증을 내며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이를 본 장애인인권센터 상담사 박씨는 의아했다. 지적장애가 있는 이씨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것은 처음봤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던 박씨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삼촌 친구가 자꾸 만나자고 해요.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해서 삼촌 친구네 집에도 갔었는데 막 내 몸을 만지고 이상한 티비도 보여줬어요. 옷도 벗기고 막대기 같은 걸로 아프게 했어요. 만나기 싫어요."

성폭행이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이씨는 이 행위들이 정확히 어떤 범죄인지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속 했다"며 "만나기 싫다"고 말했다. 상담사 박씨는 이씨의 동의를 얻어 삼촌 친구인 김씨를 성폭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강제추행과 자위기구를 이용해 강제로 유사성행위를 한 혐의로 김씨를 체포했다. 자위기구를 이용했다는 피해자 진술에 따라 증거 수집을 위해 김씨의 집을 압수수색해 성인용 비디오 12개와 남성성기 모양의 자위기구 3개를 확보했다.

"친구 조카라 예뻐했을 뿐 성폭행 아니다"

"걔는 그냥 친한 친구 조카에요. 친구와 같이 사니까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자주 봤죠. 그냥 맛있는거나 사주고 예뻐했던거지 성폭행이라뇨. 말도 안돼요."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이씨가 친구 조카라 예뻐했을 뿐 죄가 될 일을 한 적은 없다며 오히려 화를 냈다. 하지만 경찰의 계속되는 추궁에 "가슴을 만진 적은 있다"고 말을 바꿨다. 가슴을 만진 적은 있지만 속옷 안에 손을 넣거나 기구를 이용해 추행한 적은 없다고 했다.

상담사와 피해자 이씨의 진술은 일관됐다. 지적장애가 있기는 했지만, 당시 상황을 꽤 자세하게 말했다. 김씨의 집, 김씨의 차 안 등 범행 장소와 횟수도 일관되게 말했다. 아동·장애인 성폭력 사건 전문가도 피해자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물증이었다. 김씨가 이씨를 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고, 가슴을 만졌다는 진술은 확보했지만,강제로 유사성행위까지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다. 이대로 재판을 받으면 강제추행 혐의만 적용될 터였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사는 김씨 집에서 발견된 자위기구에 주목했다. 자위기구 자체로는 증거가 될 수 없지만, 피해자 말대로 도구가 피해자의 성기에 닿았다면 압수된 3개의 기구 중 어딘가에 피해자의 DNA가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검사는 압수한 3개의 자위기구를 대검찰청 과학수사과에 넘겼다.

"법광원으로 찾은 83개의 흔적…피해자 DNA 발견"

증거품을 넘겨받은 대검 조사관은 자위기구에서 범죄의 흔적을 찾았다. 넘겨받은 3개의 자위기구에 특수 조명을 비추자 희미한 얼룩들이 나타났다.

법광원을 이용한 검사다. 크라임라이트라고도 불리는데, 빛의 파장에 따라 물질에서 반사돼 나오는 색이 다른 점을 이용한 것이다. 예를들어 가시광선 아래 붉게 보이는 단풍잎이라도 적외선이나 자외선에 가까운 조명을 비추면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육안으로는 깨끗해 보여도, 법광원을 이용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질을 발견할 수 있다. 물질마다 반응하는 빛의 파장이 다르기 때문에 법광원 또한 다양한 종류가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