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사 임원이 제품을 정상적인 거래가 아닌 무자료로 거래처에 판매한 후 그 대금을 현금으로 전달받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관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임원은 이같은 방법으로 조성한 비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해 횡령했다는 범죄사실로 기소됐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습니다. 위 임원의 행위는 ① 회사 제품을 빼돌려 판매한 행위와 ② 그 대금을 보관하다가 사적 용도로 사용한 행위,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①의 행위를 횡령으로 보아 ‘제품’을 횡령했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②의 행위를 횡령으로 보아 제품의 판매대가로 받은 비자금 즉 ‘현금’을 횡령했다고 볼 것인지가 쟁점이 됐습니다.  

대법원은 횡령의 객체(대상)가 ‘제품’이 아니라 판매대금인 ‘현금’이라고 판시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대표자가 개인적 용도로 착복할 목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경우에는 비자금 조성행위 자체로써 불법영득의사가 인정돼횡령죄가 성립하지만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하더라도 법인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수단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횡령죄가 성립하지 아니한다고 전제했습니다. 

대법원은 △ 피고인은 제품 자체를 영득할 의사로 무자료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그 판매대금으로 비자금을 조성해그 비자금을 개인적으로 영득할 의사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 ‘제품’ 자체를 횡령했다고 보면 무자료 거래를 통해 조성된 비자금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에 관계없이 언제나 횡령죄가 성립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돼 부당하다는 이유 등을 들고 있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대법원 판례는 비자금 조성행위 자체로 곧바로 횡령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기존의 태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비자금이 법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대표자가 개인적 용도로 착복할 목적으로 조성된 경우에는 비자금 조성행위 자체로써 불법영득의사가 인정돼 횡령죄가 성립하지만 비자금 조성이 법인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수단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위와 같은 점 때문에 많은 비자금 관련 횡령 사건에서 피고인들은 비자금을 회사나 단체의 목적 또는 이익을 위해사용했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사실만 밝혀지고 비자금의 사용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경우에는 혐의 입증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비자금은 그 조성단계부터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이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보관 및 사용의 단계까지도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법인의 회계감사 대상도 되지 않기 때문에, 법인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함에 있어 엄격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비자금의 특성상 그 조성과 사용이 매우 은밀해 사실상 그 내부자 이외에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회사를 위해 사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엄격함이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대법원 판례에 의하더라도 피고인의 회사를 위해 사용했다는 설명을 그 정황상 쉽사리 믿기 어렵고 비자금의 사용처 자체가 법적인 관점에서 회사를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다른 명백한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개인적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추단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러한 관점에서 선거자금 또는 정치자금 지원에 사용하는 행위 등은 다분히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한 것이어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횡령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한 사례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