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사진=뉴스1

미르재단 설립 과정에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58)이 광범위하게 개입했다는 사실이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58)의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20년 가까이 전경련에 몸 담아 온 이 부회장은 "정부 지시로 전경련이 재단을 만든 것은 미르재단의 사례가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은 1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 심리로 진행된 최순실씨(61)와 안 전 수석의 5차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재단 설립 과정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그는 "안 전 수석이 2015년 7월 전화를 해 '박근혜 대통령이 주요그룹 회장들과 문화재단, 체육재단을 각각 300억원 규모로 만들기로 얘기가 됐으니 설립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 증언에 따르면 안 전 수석은 2015년 10월 쯤 다시 급하게 재단 설립을 지시하고, 전경련 직원을 청와대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미르재단 설립은 서둘러 진행됐다. 이 부회장은 "같은해 10월 말 중국 리커창 총리의 방한에 맞춰 MOU를 맺기 위해 재단 설립이 급하게 진행된 것"이라며 "그러나 현재까지도 MOU는 체결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이 부회장은 미르재단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설립을 도운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한류문화 확산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고, 다른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지만 청와대가 하는 것이니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안 전 수석은 재단의 성격과 출연금의 규모도 직접 정해준 것으로 조사됐다. 이 부회장은 특히 "안 전 수석이 재단의 규모도 3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늘리라고 일방적으로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 부회장이 먼저 모금액을 늘려야 한다고 제안을 했다는 안 전 수석의 주장과 배치된다. 이에 대해 이 부회장은 "처음에 낼 때부터 부담을 느끼는 상황인데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낼 리가 없다"며 "회원사의 회비로 먹고 사는 조직은 회원사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만큼 돈을 더 내라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해명했다.

안 전 수석은 이 부회장이 증액 지시에 따르기 어렵다고 토로하자 직접 일부 그룹에 연락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부회장은 "보통 이 같은 재단이 설립될 때는 공감대 형성 등에 시간이 걸린다"며 "이렇게 급박하게 되는 것은 보지 못했고, '청와대가 하는 것이니 되나보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청와대나 정부 지시로 전경련이 기금을 모아 재단을 설립한 것은 내가 아는 한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안 전 수석의 지시에 일방적으로 따른 이유에 대해서는 "경제수석은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일하기 때문에 그런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경제인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며 "안 전 수석의 지시는 결국 박 대통령의 지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재단 운영에 최순실씨가 개입한 정황도 드러났다. 이 부회장은 "재단 관련 의혹이 불거진 뒤 두 재단을 통합하는 안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정동춘 K스포츠재단 이사장 등이 '최 여사의 뜻이니 통합재단 이사장을 내가 맡아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알고 각종 보도가 사실인가보다 생각했다"며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안 전 수석은 관련 의혹이 불거진 뒤 이 부회장에게 허위의 진술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부회장은 "김형수 미르재단 이사장을 전경련이 추천한 것으로 하자는 부탁을 받았다"며 "안 전 수석이 '주위에서 추천을 받았다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또 "안 전 수석에게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고 청와대가 개입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안 전 수석이 전경련 직원을 통해 검찰 조사를 앞둔 이 부회장에게 보낸 메모가 공개되기도 했다. 안 전 수석은 이 부회장에게 "수사팀 확대, 야당 특검 전혀 걱정 안하셔도 되고 새누리 특검도 사실상 우리가 먼저 컨트롤하기 위한 거라 문제없다. 모금 문제만 해결되면 전혀 문제없으니 고생하시겠지만 너무 걱정말라"는 의견을 전한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