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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
물려줄 재산이 있는 사람이라면 으레 자신이 죽은 뒤 재산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면 좋을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건강에 자신이 있어 생각을 미루어두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경우 같은 것 말입니다.
그 외에도 자식들이 워낙 화목해 도저히 분쟁상황을 예상할 수 없다라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재산을 물려줄 사람(피상속인, 보통은 부모) 생전에 분란이 없었다고 해서 그 사후에도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착한 내 자식들이 재산을 놓고 싸울 리가 없어' 라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아버지가 자신이 죽은 뒤 상속재산의 처리를 어떤 지정된 사람에게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표현의 편의상 이 사람을 '관리인'이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관리인은 자식일 수도 있고, 손자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으며, 혈연관계가 없는 제3자일 수도 있습니다.
일을 맡기겠다고 결정할 때에는 피상속인과 관리인의 사이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깝고, 그 관리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관리인이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고 피상속인에게 접근하는 경우도 있지만, 피상속인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할 때 그런 경우는 많지 않고, 대개는 제일 믿을 수 있는 자식이나 정말로 괜찮은 사람을 선정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무난했던 관리인도 막상 피상속인이 사망한 뒤에는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나름대로의 이유도 있습니다. 당장에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재산이 생기면 스스로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자기 가족들이 가만 있지 않습니다. 갖은 이유를 대며 그대로 보유하자고 조릅니다.
그래도 피상속인의 믿음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은 강하여 처음부터 돌변하지는 않습니다. 맡겨진 임무에 따라 처리에 나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일수록 관계인들을 골고루 만족시키기 어렵습니다.
상속인 중에서는 돈이 급해 피상속인의 요망과 달리 빨리 재산을 넘겨달라고 조르는 사람도 생깁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상황이 답답한 나머지 공격의 화살을 그 관리인에게 돌립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리고 관리인의 이 관리업무와 아무 상관 없는 것이라도 무엇이든 트집 잡을 만한 거리를 찾아내어 과장하여 공격하고, 아버지가 이 사람을 관리인으로 선정한 과정이 석연치 않다, 뭔가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은 대개 비합리적이고 인격모독을 수반하기 쉽습니다.
이제 관리인도 마음을 바꿀 준비가 된 것입니다. 피상속인은 존경하지만, 저런 상속인은 배려해줄 필요가 없다는 합리화가 가능해집니다. 잘 생각해보면, 재산에 대해 내(관리인) 권리가 없는 것인지(또는 애초에 지정된 것보다 내 권리가 더 커야 하는 것이 아닌지)도 사실 명확하지 않습니다. '피상속인 생전에 내가 그렇게 신명을 다 하여 피상속인을 모시지 않았던가. 그때 저 상속인은 피상속인을 돕기는 커녕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은 배려해줄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 일은 원래 그런 것인지, 이 사람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은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관리인 말을 들어보면 그의 말도 그럴싸한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간 여타의 상속인들이 관리인에게 한 짓을 보면 정말 괘씸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원래 사람은 그렇게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처음부터 불량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내가 도덕적 책무를 강하게 느끼는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마음이 바뀌기 훨씬 더 쉽습니다. 돈이 관련되면 더욱 그러합니다. 돈이 관련되면 사람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야 할 이유를 훨씬 더 집요하고 근사하게 만들어냅니다. 즉, 애초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아무리 맹세를 한다한들 그 약속이 정말 지켜질 것인가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이미지에는 반하는 내용이지만, 결론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돈과 관련하여서는 그러한데, 상속은 결국 돈에 관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사람보다는 '제도'를 믿는 것이 옳은 길입니다. 신탁을 설정하든지 유언을 남기든지, 하여간 사람의 마음에 따라 왔다갔다 할 여지를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상속사건을 맡으면 맡을 수록,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점을 더 실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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