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청사

사기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 기준이 약 30년 만에 바뀌었다. 사기죄로 인정할 수 있는 행위의 범위가 대폭 확대돼 지능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각종 범죄도 사기죄로 엄벌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대법원(재판장 양승태 대법원장, 주심 김창석 대법관)은 16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기망행위로 다수 피해자들의 토지에 근저당권을 설정해 9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차용·편취한 A씨에 대해 사기혐의 무죄를 판결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A는 앞서 진행된 1,2심에서 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등 7개 혐의로 기소됐는데 사기죄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고 나머지 혐의만 유죄가 인정된 바 있다.

A는 실제로는 땅을 살 의도가 없었음에도 토지소유자인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토지거래 허가 등에 필요한 서류'라고 속여서 피해자들이 근저당권 설정계약서 등에 서명·날인하게 하고 피해자의 인감증명서를 교부받았다. A는 이를 이용해 대부업자에게 근저당권을 설정해주고 이 근저당에 근거해 총 8억9000여만원을 차용해 편취했다.

사기죄는 타인을 기망해 착오에 빠뜨리게 하고 피해자의 재산 처분행위를 유발해 이득을 얻음으로써 성립하는 죄다. 종전까지는 피해자의 '처분행위'가 인정되려면 주관적으로 피해자에게 '처분의사', 즉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객관적으로 착오에 의한 피해자의 처분행위가 있어야 했다.

이번 사건에 종전 기준을 적용할 경우 피해자들은 A에게 속아 본인소유 토지에 대해 근저당권을 설정해준 자체로 재산상 손해를 입었음에도 A를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었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행위로 빚어질 결과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사기죄는 본래 행위자가 피기망자를 착오에 빠뜨려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처분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범죄"라며 "피기망자가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정확히 인식했다면 기망을 당하지 않았거나 기망행위로 착오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사기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처분결과에 대한 피기망자의 인식이 있어야만 처분의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종전의 견해는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1987년 10월 이후 유지된 사기죄 판단기준을 변경한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기죄의 '처분의사' 의미를 사기죄의 본질, 처분행위의 역할, 다른 구성요건인 착오의 의미 등에 비춰 재해석한 것"이라며 "피기망자에게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까지 있어야만 처분의사가 인정되고 (가해자의)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본 종전 판례의 부당성을 지적해 이를 변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피기망자로 하여금 자신이 처분행위를 한다는 인식조차 못하도록 하는 더 지능적이고 교묘한 기망행위를 사용한 피고인에 대한 사기죄 처벌이 비로소 가능해졌다"며 "사기죄 성립여부에 대한 일반인의 법 감정과 더 부합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단기준 변경으로 피해자가 자신의 행위결과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던 '변종 보이스피싱' 행위에 대해서도 사기죄로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세금환급을 해준다고 속여 피해자로 하여금 보이스피싱 계좌로 돈을 송금·이체토록 하는 행위도 사기죄로 규율할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