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지난해 8월 17일, 영국주재 북한 공사로 지내던 태영호씨가 가족들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북한의 최 고위층의 주영 공사가 망명했다는 사실은 국내외로 큰 이슈가 됐다.

태 공사와 같은 북한의 고위직 출신 탈북자들은 그만큼 많은 신변 위협도 받게 된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각별한 보호를 받게 된다.

이런 북한 고위직 출신 탈북자가 해외 여행을 가게 되면 한국에서보다 국가의 보호를 받기 어렵게 돼 국가로서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여행을 허가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 허용해줘야 하는지가 문제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 고위직 출신 탈북자의 방미 목적 여권 발급 허용 여부가 문제된 대법원 판례(2007두10846)가 있어 소개한다.

A씨는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대한민국에 망명했다. 망명한지 4년 후, 그는 미국의 방위포럼재단(DFF, Defense Forum Foundation)과 허드슨연구소로부터 미국에 방문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미국 기관들로부터 초청을 받은 지 1년 정도가 지나 A씨는 외교통상부에 미국 방문을 위한 여권을 만들어줄 것을 신청했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은 외교통상부장관에게 "북한 고위직 출신인 A씨는 신변에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어 현재 정부(경찰청)의 24시간 특별신변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며 "미 초청자 측이나 관계기관에서 A씨의 신변대책을 강구해주지 않은 상황에서 방미가 이루어질 경우, 정부가 해외 현지에서 정상적인 신변보호 활동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A씨의 신변이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정원은 "A씨에 대한 여권발급을 한시적으로 보류하고, 초청자나 관계기관의 신변안전대책이 강구된 후 여권을 발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우리 여권법은 여권발급 신청을 한 사람이 출국할 경우 테러 등으로 생명이나 신체의 안전이 침해될 위험이 큰 사람인지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신청을 받은 외교통상부장관은 미리 법무부장관과 협의해 발급 여부를 심의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외교통상부장관은 법무부장관에 협의요청을 했고, 법무부장관은 "A씨는 북한이탈주민으로서 북한에서의 지위, 탈북 동기나 경위 등에 비추어 해외 여행 시 북한의 테러를 받을 위험성이 있다"며 "북한도 최근 A씨에 대한 신변위해 의도를 나타낸 바 있어 자칫 그 신변에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 남북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같은 시기 서울 소재 '탈북자동지회' 사무실 출입문 앞에 식칼이 꽂히고 그 아래 'A씨를 죽여 버리겠다'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하는 등 A씨는 국내에서도 신변위해 가능성으로 지속적인 신변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에 외교통상부장관은 A씨의 여권발급을 한시적으로 보류하며, 여권발급신청서를 반송하는 '여권발급신청 거부처분'을 했다.

하지만 A씨는 "외교통상부장관의 여권발급신청 거부처분이 헌법상 보장되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처분에 불복하는 '처분 취소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A씨가 과연 여권법상 여권 발급을 거부할 수 있는 '출국할 경우 테러 등으로 생명이나 신체의 안전이 침해될 위험이 큰 사람'에 해당되는지 여부가 문제됐다.

대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먼저 "헌법 제14조에서 규정하는 거주·이전의 자유란 국민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주소나 거소를 설정하고, 또 그것을 이전할 자유를 말하며, 그 자유에는 국내에서의 거주·이전의 자유 이외에 해외여행 및 해외이주의 자유가 포함되며, 해외여행 및 해외이주의 자유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여행하거나 이주할 수 있는 자유로서 구체적으로 우리나라를 떠날 수 있는 출국의 자유와 외국 체류를 중단하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입국의 자유를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여권의 발급은 해외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국민의 해외여행의 자유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권리이자 이동의 자유로운 보장의 확보를 통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신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기본권"이라며 "거주·이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돼야 할 것이며, 그 권리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A씨의 기본권인 거주·이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므로, 여권법 상의 제한 사유에 대한 해석 역시 최대한 A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외교통상부장관이 주장하는 미국 측의 A씨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문제는 여권발급을 제한할 수 있는 사유가 아니며, A씨가 현재 안전가옥에서 24시간 경호를 받는 등 그 행동에 여러 제약을 받고 있는 처지라는 점을 감안할 때, A씨에게 초청자 측의 신변안전의 보장까지를 요구하는 것은 그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것이어서 여권법의 제한 규정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재판부는 "외교통상부가 거부 사유로 든 국내에서의 신변위해 가능성과 A씨의 방미 중 신변안전에 문제가 개연성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A씨에 대한 여권 발급 거부는 부당하다고 봤다.

그 결과 대법원은 "외교통상부장관은 A씨에 대한 여권 발급 거부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단을 내렸고, A씨는 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게 됐다.

◇ 판례 팁 =  A씨가 외교통상부장관을 피고로 하여 제기한 소송은 외교통상부장관이 한 '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인 '행정소송'이다. 행정소송법은 취소소송의 제소기간을 처분 등이 있음을 안 날로부터 90일, 처분 등이 있은 날부터 1년 이내로 규정해두고 있다.

이 때, '처분 등이 있음을 안 날'이란 통지·공고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당해 처분이 있은 것을 현실적, 구체적으로 안 날을 말하고, 추상적으로 알 수 있었던 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 대법원의 입장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행정처분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 족하고, 그 구체적 내용이나 위법여부까지 알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 관련 조항

- 대한민국헌법

제14조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제37조 ②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 여권법

제12조(여권의 발급 등의 거부ㆍ제한)

① 외교부장관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여권의 발급 또는 재발급을 거부할 수 있다.

1. 장기 2년 이상의 형(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고 기소(기소)되어 있는 사람 또는 장기 3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고 국외로 도피하여 기소중지된 사람

2. 제24조부터 제26조까지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되지 아니하거나 집행을 받지 아니하기로 확정되지 아니한 사람

3. 제2호 외의 죄를 범하여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되지 아니하거나 그 집행을 받지 아니하기로 확정되지 아니한 사람

4. 국외에서 대한민국의 안전보장ㆍ질서유지나 통일ㆍ외교정책에 중대한 침해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경우로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

가. 출국할 경우 테러 등으로 생명이나 신체의 안전이 침해될 위험이 큰 사람

나. 「보안관찰법」 제4조에 따라 보안관찰처분을 받고 그 기간 중에 있으면서 같은 법 제22조에 따라 경고를 받은 사람

② 외교부장관은 제1항제4호에 해당하는 사람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할 때에는 미리 법무부장관과 협의하고 제18조에 따른 여권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③ 외교부장관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 사실이 있는 날부터 1년 이상 3년 이하의 기간 동안 여권의 발급 또는 재발급을 제한할 수 있다.

1. 제1항제2호에서 규정하는 죄를 범하여 그 형의 집행을 종료하거나 그 형의 집행을 받지 아니하기로 확정된 사람

2. 외국에서의 위법한 행위 등으로 국위(국위)를 크게 손상시킨 사실이 재외공관 또는 관계 행정기관으로부터 통보된 사람

④ 외교부장관은 제1항이나 제3항에 따라 여권의 발급 또는 재발급이 거부되거나 제한된 사람에 대하여 긴급한 인도적 사유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해당 사유에 따른 여행목적에만 사용할 수 있는 여권을 발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