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당당히' 성범죄 밝히는 '가해자들' 사회가 가하는 '2차 폭력'

[the L]김광민 변호사의 '청춘발광(靑春發光)'…성폭행 가해자에게는 '관대' 피해자에게는 '잔인'한 사회적 시선 '이제 그만'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대학 동기 여학생을 지독하게 짝사랑하던 남학생이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매정한 그녀에 대한 혼자만의 사랑으로 힘겨워하던 그는 결국 강제로라도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돼지를 교배시킬 때 쓰는 흥분제를 구했다. 맥주에 몰래 타 그녀에게 먹였고 정신을 잃은 그녀를 모텔에 데려갔다. 그녀를 여관방 침대에 눕힌 남자는 옷을 벗기려 했다. 그러나 그의 무모했던 모험은 정신이든 그녀에게 얼굴을 온통 할퀴고 와이셔츠까지 박박 찢기는 것으로 끝났다.

자서전에 '약물 강간 미수' 당당히 밝힌 대통령 후보…왜?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유력 대선후보의 자서전에 소개된 이야기다. 그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해 넣었을 뿐이라며 해명했다. 소속정당은 자서전의 특성 상 주변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꾸미기도 한다고 에둘렀다. 그런데 그는 다시 방송 인터뷰에서 "설거지는 여자가 할 일"이라고 해서 또 한 번 논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내가 좀 세 보이려고 한 말"이라고 해명했다. 경쟁자인 다른 대선 후보는 "여성에게 설거지 시키는 것이 센 것인가?", "여성을 종으로 보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발언"이라며 비난했다.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정리되는 듯하다. 경쟁 대선후보들은 사퇴를 요구했지만 그는 사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율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친구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이고 좀 세보이려는 농담일 수도 있다. 유권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에 대한 지지를 유보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돼지 흥분제가 정말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데이트강간 약물' 또는 '물뽕'라 부리는 'GHB'라는 약물이 있다. 초기에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되지 않았고 제조방법도 비교적 간단해 무분별하게 유통돼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무색무취인데다 술에 몇 방울만 타도 10~15분 내에 효과가 나타났다. 조금만 복용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취한 듯한 느낌이 들지만 많이 복용하면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증상 또한 과음의 그것과 같아 약물의 복용을 확신하기 어렵다. 때문에 상대의 술에 GHB를 몰래 타서 정신을 잃게 한 후 강간 하는 범죄가 빈번했다. 심지어 과다복용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까지 있는데 사인이 GHB 과다복용으로 의심되는 사건도 다수 발생했었다. 다행히 지금은 GHB가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되었고 유통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관련 범죄가 줄어들었다. 돼지 흥분제를 구했던 유력 대선후보의 친구는 GHB와 같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명백히 준강간에 해당하는 범죄다.

공공연히 밝히는 '약물강간'에 '리벤지포르노'까지…어차피 피해보는 것은 '여성·피해자'?


문제는 '대선후보 자서전'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범죄를 소재로한 영화나 소설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에도 공공연하게 성폭행 경험을 밝히는 이들이 보인다. 반면 성폭행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은 매우 드물다.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2014년 개봉 영화 '한공주' 정도다. 성폭행 피해자 역을 맡은 배우 천우희가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쥘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지만 흥행은 고작 22만여 명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연애기간 성관계를 동영상으로 촬영해 보관하다 헤어진 후 공개하는 행위다. 헤어짐에 대한 복수인 것이다. 간혹 동영상 공개를 미끼로 협박해 원하지 않는 연인관계를 이어가거나 금전을 뜯어내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리벤지 포르노'는 여성의 얼굴만 촬영되거나 남성의 얼굴은 가려져 유통된다. 하지만 이보다도 동영상이 공개되면 '어차피 피해보는 것은 여성'이라는 심리가 작용하지 않았다면 성관계 동영상을 공개하지는 못할 것이다.

성폭력 가행자의 이야기는 사회에서 쉽게 소비되면서 피해자의 이야기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성폭력 가해자에게는 관대한 반면 피해자에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철저히 피해 사실을 숨기고 선뜻 신고하지 못한다.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조신하지 못한 여자'라거나 '그럴만한 행실을 했을 것'이라는 식이다. 이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성폭력 피해 자체를 수치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가해자는 떳떳한 반면 피해자는 자꾸 움츠려드는 이유다.


성폭행 피해자 "그럴만한 행실때문?"…가해자에게는 '관대' 피해자에게는 '잔인'한 사회적 시선

이는 청소년이나 아동일 경우 더 심각하다. 성폭력을 당했음에도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서, 부모님에게 혼날까봐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가장 예민한 부분인 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에 근본적인 상처를 입힌다. 때문에 적절한 심리치료를 받지 못하면 평생 그 상처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아동이나 청소년의 경우는 그 고통이 더욱 크다.

간혹 유아기에 당한 성폭력을 성인이 돼서야 신고하는 경우가 많다. 성범죄는 발생 직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증거를 보전하기 어렵다. 때문에 범죄 발생 후 십여 년이 지나서 신고하는 경우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 다행히 범죄를 입증한다해도 공소시효가 도과하기 쉽다. 다행히 2010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면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는 피해자가 성년이 된 날부터 공소시효가 진행돼서 공소시효의 문제에서는 다소 자유로워졌다.

아동·청소년들은 성폭행 그 자체가 극심한 공포면서 이를 드러냈을 때 사회로부터 받을 2차 폭력이 두려워 숨기는 경우가 많다. 평생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신고를 하곤 한다. 아동·청소년 상대 성범죄의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미성년자 상대 성범죄의 공소시효 특례는 바람직한 규정이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 많이 희석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순결사상이 남아있다. 그리고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는 왜곡된 환상도 존재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피해자들을 자꾸만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들이 당당히 자신의 피해를 밝히고 가해자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면 굳이 미성년자 상대 성범죄의 공소시효 특례는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김광민 변호사는 부천시청소년법률지원센터 소장이다. 청소년을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그들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자신의 모습에 오늘도 힘들어한다. 생물학적 회춘은 불가능해도 정신적 회춘은 가능하리라 믿으며 초겨울 마지막 잎새가 그러했듯 오늘도 멀어져가는 청소년기에 대한 기억을 힘겹게 부여잡고 살아가고 있다. 정신적 회춘을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청소년의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머니투데이 더엘(the L) 외부 필진의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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