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경영권 승계 과정 전반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77,200원 1400 -1.78%) 부회장이 부친인 이건희 회장의 와병 이후 오히려 경영권 승계를 사양했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는 진술이 나왔다.

삼성그룹 고위 임원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한 이가 이 부회장 구속 결정의 핵심 근거였던 경영권 승계 논리를 제공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 심리로 진행된 이 부회장과 삼성 전·현직 임원 등 5명에 대한 공판에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신청한 마지막 증인으로 김 위원장이 출석했다.

재판에서 변호인단은 김 위원장에게 '김종중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이하 미전실) 전략팀장(사장)으로부터 이 회장이 쓰러진 뒤 공백기가 장기화돼서 이 부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해야 하는데 이 부회장이 사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정확한 얘기가 그렇진 않았던 것 같지만 그룹 참모들 차원에서 이 부회장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 그룹을 이끌었으면 하는데 아직 이 회장이 살아있고 자신도 준비가 부족하다면서 이 부회장이 사양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김 위원장은 "그 말을 듣고 언젠가 승계할 거라면 빨리 지위와 상응하고 책임지는 자리로 가는 게 지배구조 개선에 맞는 길이라고 김 전 사장에게 얘기했다"고도 밝혔다.

김 위원장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의 과정에서 지원을 부정청탁하고 뇌물을 건넸다는 특검팀의 논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다만 "(김 전 사장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시점이) 2016년 이후일 것"이라고 말해 삼성물산 (150,300원 100 -0.07%) 합병, 삼성생명 (86,600원 1200 1.41%) 중간금융지주사 추진 등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지목된 작업이 진행된 2015~2016년 중반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경영권 승계를 지원받으려다 여의치 않자 태도를 바꿨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셈이다.

김 위원장은 "경영권이 3세로 넘어가는 상황에 이 회장의 가신들이 많은 정보를 왜곡하고 이 부회장에게 올바른 정보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회장이 지금 이런 상황에 몰린 것"이라며 "삼성물산 합병은 미전실 기획 아래 결정되고 집행된 승계 시나리오의 한 부분"이라고도 주장했다.

또 "이 회장이 쓰러진 뒤 그룹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 이 부회장과 최지성 전 미전실 실장(부회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사장), 김 전 사장이 거의 매일 사무실에 모여서 회의를 해 결정한다고 들었다"며 '4인 집단체제' 방식의 운영 역시 경영권 승계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변호인단은 이와 관련, "삼성물산 합병은 변화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경영상 판단이었을 뿐 승계를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며 "삼성생명의 금융지주사 전환도 2000년 이후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면서 금융지주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또 "이런 시각이라면 합병 등 경영상 판단을 모두 승계와 관련 있다고 의심해야 하느냐"며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은 사실상 이미 완료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이날 취임 한달만에 첫 휴가를 내고 관용차 대신 개인 소유 차량을 직접 몰고 법원을 찾았다. 김 위원장은 "공정위원장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수 특검은 지난 4월7일 첫 공판 이후 처음으로 법정에 나와 줄곧 재판을 지켜봤다. 특검팀 관계자는 "장관급인 김 위원장에 대한 예우와 증언의 중요성 등을 감안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박 특검은 신문에 나서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