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사진=뉴스1

주식회사의 대표이사가 회사에 손해를 끼칠 의도로 무효인 약속어음을 발행하는 경우라도 이 어음이 제3자에게 실제로 유통되기 전까지는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기존 판례대로라면 어음 발행행위만으로 배임죄로 처벌됐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신 대법관)는 20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혐의를 받은 김모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판단하기위해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김씨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A사의 대표이사로 일하면서 별도로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B사의 23억원의 대출금 채무를 담보하기 위해 모저축은행에 A사 명의로 액면금 29억 9,000만원의 약속어음을 발행해 준 혐의다.

김씨는 이같은 약속어음 발행 사실은 인정했지만 회사가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대표가 개인의 채무를 담보하기 위해 회사 명의의 약속어음을 발행하는 것을 대표권 남용행위라고 하는데,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고 있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했을 경우 법적으로 무효가 된다는 법리 때문이었다.

대법원은 판례를 변경해 "무효인 약속어음이 실제로 제3자에 유통되기 전까지는 배임죄의 재산상 손해 요건에 해당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험이 초래됐다고 볼 수 없다"며 "배임미수죄로만 처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종래의 판례는 배임죄의 '손해를 가한 때'에 현실적인 손해 외에 실해 발생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도 포함된다고 해석했다"며 "실해 발생의 위험을 가한 때는 손해를 가한 때와 전혀 같지 않은데도 이 둘을 똑같이 취급하는 해석은 형벌규정의 의미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박보영 대법관 등 4명은 배임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약속어음 발행의 법적 효력 여부, 제3자 유통 여부와 무관하게 어음채무가 실제로 이행한 때에만 배임죄에 해당한다며 별개의견을 냈다.

기존 판례의 태도는 "약속어음 발행행위가 무효이더라도 약속어음이 제3자에 유통되지 않는다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됐다고 봐야 한다"며 배임죄의 성립을 인정해 왔다. 발행행위가 무효이고 어음채무가 실제로 이행되지 않은 경우에도 그 약속어음이 제3자에게 유통될 가능성이 부정되지만 않으면 곧바로 배임죄로 인정해 죄의 성립시기를 빠르게 본 것이다. 1심과 항소심 판결도 이를 따랐다.

대법원 관계자는 "종전 판례에 의하면 약속어음 발행 사안에서 배임죄의 기수 시기가 너무 앞당겨지는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1심 재판부는 "김씨가 A사 명의로 약속어음을 발행함으로써 A사에게 배임죄에서의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됐다"며 "김씨가 미필적으로나마 피해 회사에 대한 손해 발생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용인했다"고 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역시 종전 대법원 판례의 태도에 따라 "문제가 된 약속어음은 유통되지 않을 것이었고 실제로도 유통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김씨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채 원심 판결을 받아들였다. 이같은 판결은 대법원에서 뒤집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