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

판사는 헌법에 의해 독립성이 보장된 특별한 직업이다. 그런 판사들도 인사 평가는 피할 수 없다. 판사들이 성실하게 재판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선 불가피하다. 문제는 인사 평가가 판사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경우다.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한다.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행정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지만, 대법원장의 특급보좌기관으로 인식된다. 지나치게 막강하다는 지적을 받는 대법원장의 권한은 이곳을 통해 구현된다. 인사에 목을 매는 판사들의 생사여탈 권한을 쥐고 있고, 나아가 판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 된다.

사법부의 독립은 행정·입법부로부터의 독립에 머무르지 않고 법관 개인의 독립으로 완성돼야 한다. 그런데 법관의 독립과 양심을 침해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과도하게 집중된 대법원장의 권한이 꼽힌다.

대법원장의 권한을 축소하면 그 만큼의 권한은 누구에게 넘겨야 할까? 국회는 대통령, 국회, 판사들이 추천한 인사들로 구성된 사법평의회에 판사 인사권을 주자고 한다.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판사들은 정치권의 입김으로 재판 독립성이 침해될 수 있다며 반대한다. 판사들에 대한 인사권을 대법원장 혼자 틀어쥐어서도, 외부에 넘겨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대법원장의 권한 집중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재판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과도하게 집중된 대법원장의 권력 = 대법원장의 과도한 권력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일면서다.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가 법관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법관인사개혁 세미나를 축소하라고 압력을 행사하고, 더 나가 일선 판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의혹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는 결국 전국법관대표회의(판사회의)의 소집과 상설화로 이어졌다.

각급 법원 대표가 참여한 판사회의는 ‘사법행정권 남용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으로 법원행정처의 권한 축소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를 요구했다. 판사 근무평정과 법원행정처 심의관 등 재판을 하지 않는 보직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대법원장의 과도한 인사권에 대한 문제로 압축된다.

일선 판사들에게 ‘인사가 문제’라는 공감대는 이미 폭넓게 형성돼 있다.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올 초 전국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501명 가운데 89%가 ‘인사 문제가 개선돼야 한다’고 답했다. ‘대법원장·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의 정책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한 법관이 보직·평정·사무분담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없다’는 질문에는 88.2%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법조계 원로들 역시 대법원장에 집중된 권한을 재판 독립을 위협하는 핵심요인으로 지적한다. 이홍훈 전 대법관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제기된 것만으로도 문제”라며 “대법원장이 모든 행정권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 전 대법관은 “사법행정에 대법원이 깊이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행정은 재판을 돕는 범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판사를 공무원으로 만드는 ‘승진제도’=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장에 의한 법관 인사가 판사를 ‘관료’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수평적이어야 할 판사 조직이 행정부처럼 수직 관료화된 이유는 승진제도 때문”이라며 “근무평정권과 인사권을 가진 대법원장의 의중을 판사들이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법관이 헌법과 법률, 양심 외에 대법원장이나 법원장 등 인사권자의 의중을 헤아리는 순간 법관의 독립성이라는 헌법적 가치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판사는 대법관이 되기 전까지는 승진이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법원장이 ‘발탁’하는 고법 부장판사는 대부분의 판사가 오르고 싶어하는 자리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 차관급 대우를 받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그래야 사실상 법원장과 대법관이 될 자격을 얻는다.

임 교수는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고법 부장판사 제도를 폐지하고 순환보직으로 바꾸기로 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부임 이후 중단된 상태”라며 “사법부가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했다.

승진을 제외하고 일선 판사들이 가장 크게 신경 쓰는 게 근무지다. 현재 전국 3000여 명의 판사들은 2년마다 근무지를 옮긴다. 근무지를 결정하는 건 법원행정처, 즉 대법원장이다. 인사 때마다 판사 들은 대법원장의 강력한 인사권을 몸으로 느낀다.

전 대법관 출신 A변호사는 “근무지 전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법개혁은 힘들다”고 지적했다. 사법개혁의 시작과 끝이 결국 인사에 있다는 의미다.

◇판사 인사·평가하지 말자고? = 판사 평가가 사법부 독립을 위협한다면 이를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 교수는 “문제가 있는 판사는 법관 징계 제도로 걸러낼 수 있고, 임관 후 10년이 지나면 재임용 심사를 한다”며 “재임용 제도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평가가 가능하다”고 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헌법재판관 출신인 B변호사는 “판사도 사람인 만큼 평가를 받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법관 평가가 외압에 흔들릴 수 있는 판사를 다잡아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판사의 독립적 판단을 해치는 외부 세력은 비단 정치권 뿐이 아니다. 여론 역시 판사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외압이 될 수 있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신상이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퍼지고 협박으로까지 이어지는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B변호사는 “실제 법리와 상관없이 여론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면 판사도 여론에 맞춘 선고를 하고 싶다는 유혹이 들 수 있다”며 “그게 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때 판사가 흔들리지 않고 법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게 다잡는 것이 법원 안에서 이뤄지는 평가”라며 “여론과 상관없이 법리에 따른 판단이 이뤄졌는지, 기록을 제대로 보고 변론을 제대로 듣고 재판을 제대로 했는가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곳은 결국 법원 내부”라고 말했다. 다만 “법관 평가는 다른 조직에서의 평가와는 달라야 한다”며 “판사 전원이 재판을 하고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평가가 좋은 재판을 할 수 있는 자극을 주면서도 평가 때문에 좌절하는 판사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문제는 대법원이 법관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겼다”며 “모든 판사들이 자긍심과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평가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과 밖’으로부터의 독립= 결국 사법행정 개혁의 핵심은 판사 평가권한을 누구에게 주느냐로 귀결된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는 사법평의회를 대안으로 내놨다. 국회 추천 8명, 대통령 지명 2명, 법원 선출 6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에 판사 인사 등 행정에 대한 주요 의사 결정을 맡기자는 입장이다.

법원은 반발하고 있다. 판사 평가를 정치권 등 외부에 맡기는 것은 사법부의 재판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우려한다. 이 전 대법관은 “사법평의회는 사법 독립성을 훼손될 위험이 있다”며 “사법부 내 법원행정처를 그대로 두되 대법원장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양삼승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는 “입법부가 사법부에 간섭하겠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이라며 “법원행정처가 인사와 행정을 맡고, 대신 판사회의의 동의를 받는 방식 등 사법부 안에서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장 견제를 외부 기구에 맡기는 것보다 일선 판사들의 모임인 판사회의 등
사법부 내부에 견제 기구를 두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법원행정처 본래의 목적을 되찾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A변호사는 “당 초 법원행정처의 역할은 법관 통제가 아니라 정치권 등 외압에서 법원을 지키는 것이었다”며 “현재 일부 문제를 발견했다고 법원행정처를 없애고 평가와 인사를 비롯한 행정 전반을 외부 기관에 맡기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이공현 전 헌법재판관은 “(만일) 사법평회의를 구성해도 국회와 행정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위원의 절반 이상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법관이 맡아야 한다”며 “사법평의회를 통해 주요 결정을 내리되 집행기구는 따로 두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판사 경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법원장으로부터 독립된 전직 법관들을 활용하는 것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임 교수는 “사법평의회가 아닌 사법행정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국회와 법원에 이해관계가 없는 전직 법관들을 판사회의가 추천해 임명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러나 대통령이 위원 선정에 개입하는 것은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를 위한 사법개혁인가= 유명무실해진 법관인사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법원조직법은 법관 인사에 대한 중요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대법원에 법관인사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있다. 법관과 검사, 변호사, 교수, 일반인 등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회는 판사의 임명, 연임 등을 심의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전 헌법재판관은 “현재 사실상 자문기구에 불과한데 기능을 보강하고 활성화해 다양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사법행정 개혁을 위해 제도 개선이 불가피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운영할 사람에 있다. 결국 누가 차기 대법원장이 되느냐가 사법행정 개혁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

양 변호사는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까지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이 새 대법원장이 돼야 한다”며 “외압에 시달렸던 사법부의 역사와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할 수 있는 인사가 대법원장으로 적임”이라고 했다. 이 전 대법관 역시 “시스템도 결국은 사람이 만드는 만큼 차기 대법원장의 책임과 역할이 크다”며 “판사가 인사에 신경을 쓰게 되면 제대로 재판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식견을 갖고 실행해갈 수 있는 인물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 원로들은 무엇보다도 ‘누구를 위한’ 사법개혁을 할 것인지가 논의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B변호사는 “사법개혁은 결국 국민을 위한 것이 돼야 한다”며 “판사 지위를 보장하는 게 사법개혁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사법개혁 논의에는 국민만 쏙 빠져있다”며 “소시민이 편안하게 법정에서 제대로 된 재판을 받고 무고하게 처벌받지 않도록 해주는 게 사법개혁의 방향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