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에서 이겨도 내가 왜 이겼는지, 져도 왜 졌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재판부가 진 쪽의 주장을 어떤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판결문에 나와 있지 않아요. 판사들이 사건을 제대로 본 건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죠."

사건은 많은 반면 판사는 적다보니 판사들이 개개 당사자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시간도 제한되기 마련이다. 일선 판사에서 시작해 헌법재판관까지 40년 가까이 법관으로 근무한 이공현 변호사(법무법인 지평)는 "재판 당사자는 판사가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끼면 불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할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인다"며 "이같은 불만은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발간한 '2016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5년 한해 동안 전국 각급 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총 2061만2000여건에 달했다. 이를 그 해 전국 판사 수(2894명)로 나눠보면 판사 한명이 1년간 평균 7122건의 사건을 배당받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공휴일이나 주말을 제외한 1년 평균 근무일(약 230일)을 기준으로 판사 한명이 하루 평균 31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식 재판을 거쳐야 하는 본안사건만 봐도 판사 한명이 1년에 평균 500여건씩을 처리한다.

2월말 현재 우리나라의 판사 수는 총 3034명으로, 판사 1인당 인구가 1만7000여명에 달한다. 반면 인구가 8000만명 수준인 독일은 판사 수가 약 2만명으로, 판사 1인당 인구가 4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그러나 판사 수는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에 규정돼 있다는 점에서 국회를 거치지 않고선 추가 증원이 쉽지 않다. 이 법에 따르면 올 2월말 현재 3034명인 전국 판사 수는 2019년 3214명까지 늘어나게 돼 있다. 판사 수를 이보다 빠른 속도를 늘리기 위해선 사회적 합의와 예산 문제 해결도 전제돼야 한다.

판사 수 확대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도로를 넓히면 교통체증이 줄어들 것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도도를 넓혀도 그만큼 차도 늘어나기 때문에 교통체증은 그대로"라며 "판사 수가 늘어나 사건 처리 속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소송도 늘어나기 때문에 판사들의 업무부담은 별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행정처장 출신의 C변호사는 "막연히 판사 수가 적으니 늘리자는 것보다는 사건을 제대로 처리할 판사들을 양성하는 게 진짜 재판개혁"이라고 했다.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상고를 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점이 현행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지적도 있다. 본안사건만을 기준으로 할 때 1심 사건 건수는 2006년 157만8000건에서 2015년 133만5200건으로 약 16% 줄었다. 반면 항소심(2심) 사건은 같은 기간 10만3800여건에서 14만9000건으로 43% 늘었다. 상고심(3심) 사건 역시 같은 기간 2만3000건에서 4만1900건으로 83% 증가했다. C변호사는 "1심 사건이 줄었는데도 항소·상고사건이 대폭 늘어났다는 것은 1심 판사들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1·2심 등 하급심 강화를 위해 경력이 오래된 고참 판사들을 1·2심에 전진배치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임 교수는 "연륜이 있는 판사들을 대거 지방법원으로 보내 좋은 재판을 통해 좋은 판결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며 "연륜 있는 판사들의 전진배치로 하급심이 강화될 경우 사법 서비스에 대한 국민들의 만족도가 높아져 항소율도 낮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에서 활동 중인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1심에 연륜과 실력을 갖춘 고참 판사들이 배치돼야 한다"며 "사회경험도 없이 시험에 갓 합격한 사람이 성적이 좋다는 등 이유로 판사로 임용돼 1심에 배치될 경우 이해충돌이 첨예한 사건 당사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승복시킬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1심에 경력이 많은 판사들을 배치해 하급심의 분쟁해결 능력을 높이고, 상급심에 신참 판사들을 배치해 경험을 쌓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선 판사들이 승급제도에 연연하지 않도록 인사 시스템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급심 강화 차원에서 전문법원을 확대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분쟁의 내용이 날로 복잡해지고 있는 만큼 부문별 전문법원 도입을 통해 판사들의 전문성을 높여 하급심의 분쟁해결 능력을 키우자는 주장이다. 현재 전문법원은 특허법원, 가정법원, 행정법원에 올 3월 문을 연 회생법원까지 총 4가지가 있다. 이에 더해 노동법원을 신설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고용형태가 다양해지고 노동 문제를 둘러싼 법리다툼이 날로 첨예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법률원의 권두섭 변호사는 "일률적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노동문제의 특성을 고려해 현장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별도의 법원이 필요하다"며 "노동사건은 확정판결이 나오기까지 최소 3~4년이 걸리는데 전문법원이 도입되면 절차적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가정법원이 생긴 뒤 모호했던 판단 기준이 통일되고 이 기준이 전국적으로 전파되는 등 순기능이 있었다"며 "노동법원 역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노동자들의 신속한 권리 구제 측면에서 분명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했다. 조재연 대법관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현재 법원이 전문법원을 순차적으로 설치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시급히 검토해야 할 것이 노동법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재판보다 '조정'

일각에선 형사법원을 따로 떼어내자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지방법원의 경우 1963년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으로 분리됐다가 1995년 다시 서울중앙지법으로 통합된 바 있다.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민사 사건과 형사 사건이 더욱 복잡해진 만큼 판사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다시 분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C변호사는 "고등법원에 발령이 나면 과거에는 민·형사 재판부나 연구관 등을 거치며 3~5년간 근무했지만 이제는 판사 수가 많아지는 등의 이유로 민사부 1년, 형사부 6개월 등 극히 짧은 기간만 근무하게 된다"며 "이런 시스템은 재판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판사들의 전문성을 키우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적당히 민사를 다루다가 또 형사를 기웃거리는 식의 판사 운용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며 "형사 사건을 전문으로 10년씩 할 수 있게 해야 판사의 전문성 제고와 재판의 질 제고를 도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항소법원을 별도로 만들어 우수한 자원을 투입하고 사실상 재판을 거기서 다 끝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며 "하급심의 분쟁해결 능력이 제고돼야 사법부 전체적으로 재판의 질이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나 전문법원 설치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B변호사는 "의사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서 신체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갖춘 후 전문의로서 지식을 갖춰야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며 "마찬가지로 판사의 전문성을 너무 세분화할 경우 사건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세부 분야까지 전문법원을 신설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법원이 모든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판사 수 증원이나 전문법원 신설 등의 결론으로 이어진다"며 "판사를 통하지 않고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대체분쟁해결제도'(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의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체분쟁해결제도란 조정, 화해, 중재, 알선, 협상 등 재판 이외의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분쟁의 경우 재판까지 가지 않고 해결되도록 하면 당사자 입장에선 분쟁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고, 다른 국민들 입장에선 판사들의 사건 부담이 줄어 그만큼 질 높은 재판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신속한 분쟁해결으로 사회적 갈등비용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이 이사장은 "어떤 사건이든 일단 법정으로 오면 칼로 자르듯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며 "재판까지 가지 않고 조정 등으로 분쟁을 해결하면 양측 모두 어느 정도 만족하는 결과를 거두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대체분쟁해결의 활성화까진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 교수는 "우리 국민들 사이에선 아직 조정·중재·화해를 맡는 변호사 등 전문직역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 제3자를 통한 분쟁해결 방식에 대한 낯설음이 있다"며 "대체분쟁해결이 활성화되려면 이런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