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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판결②] "부부라도 강요하면 강간죄"

[the L] '가부장적·수직적 부부 관계' 깬 혁명적 판결…"이혼 소송에 악용" 우려도

편집자주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최종심급이다. 특히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 이후 모든 판결의 가이던스가 된다. 오는 25일 퇴임하는 양승태 대법원장도 6년간의 임기 동안 수많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남겼다. 그 중엔 세상을 바꾼 의미 있는 판결도, 논란을 남긴 아쉬운 판결도 적지 않았다. 머니투데이 법조팀(the L)이 법학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추려낸 양승태 대법원의 '세상을 바꾼 판결들'과 '논란의 판결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 2011년 11월11일 안산시의 한 주택. 강모씨(49)가 부엌에서 흉기를 꺼내 들고 한 여성을 위협했다. 강씨는 겁을 먹어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는 이 여성을 성폭행했다.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틀 뒤 같은 장소에서 이 여성을 두차례 더 유린했다. 이번에는 피해자의 이마와 팔에 상처도 입혔다. 

피해자는 다름 아닌 강씨의 부인. 2001년 결혼한 이들은 2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큰 문제가 없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2008년 강씨가 처가 식구들이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일을 시작하며 부부 사이 다툼이 잦아졌다. 그는 처가 식구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강씨는 일을 그만둔 뒤부터는 부인의 남자관계까지 의심했다. 이 때부터 폭행과 강제적인 성관계가 시작됐다.

2013년 5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부인을 흉기로 위협한 뒤 강제로 성관계를 한 혐의(특수강간) 등으로 기소된 강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또 신상 정보를 7년간 공개하고,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를 10년간 부착할 것을 명령했다.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죄가 인정된다고 본 최초의 판결이었다. 함께 사는 부부라도 서로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더 나아가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부부 관계의 틀을 깬 혁명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다. 

◇"부부라도 강요된 성관계 감내할 의무 없어"

대법원은 1970년 3월 실질적인 부부 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때는 설령 남편이 강제로 부인을 성폭행했다고 하더라도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후 40여년간 이 판례가 유지돼 왔다. 성적 욕구와 취향 등이 개인별로 매우 다르고 성관계가 부부 사이에 은밀하게 이뤄지는 성격이 있는 만큼 개인 사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강씨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강씨가 부인을 성폭행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1심에서 징역 6년을, 2심에서는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공개변론을 여는 등 고심을 거듭한 끝에 2심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부인에 대한 성폭력은 매우 사적이고 은밀한 성격이 있고 반복적·지속적 양상을 보이는 탓에 적절한 대응이 없으면 여성들의 피해가 더 심각해질 위험이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부인 성폭력 문제가 자율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심각하게 유린되는 상황이 지속되는데도 국가가 개입을 자제한다면 헌법이 천명한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에 기초한 혼인생활을 보장할 국가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또 "민법상 부부 사이에 동거의무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폭행·협박에 의해 강요된 성관계를 감내할 의무가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없다"며 "혼인이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고 성적으로 억압된 삶을 인내하는 과정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가부장·수직적 부부 관계 틀 깨뜨린 판결"

대법원 판결 이후 실제 부부 사이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정상담 전문가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장은 이 판결을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인식을 바꾼 일대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김 원장은 "판결 이후 기혼 여성들에게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억지로 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동안 기혼 여성들이 '의무'라고 생각하고 감내해야 했던 일들이 공론화됐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 판결이 성관계 뿐 아니라 부부 관계 전반에까지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도 있다. 김 원장은 "대법원 판결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은 억지로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됐다"며 "기존의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부부 관계의 틀을 깨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가사·이혼 전문 조혜정 변호사는 "남편이 장기간 물리적·성적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이혼을 거부할 때 남편을 강간죄로 형사고소한 뒤 이를 계기로 쉽게 이혼 동의를 받았던 사례가 있다"며 "대법원 판결로 기혼 여성들을 보호할 법적인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남편에게 학대받는 여성들에게 대항할 무기가 생겼다는 뜻이다.

한편 부부 강간죄가 이혼 소송에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부부 사이가 사실상 깨졌을 때 부인이 감정적 보복을 하기 위해서나 재산분할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남편을 강간죄로 허위 고소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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