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씨가 유명인이 아니었어도 병원이 사과하고 보상을 약속했을까? 의료사고를 당했어도 환자는 여전히 병원에게 약자다. 의료사고의 입증책임이 환자에게 있고, 비전문가인 환자가 이를 입증하긴 쉽지 않아서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의료과실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달라'는 청원이 잇따라 올라왔다. 이중 한 청원자는 의료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며 "의료사고가 발생한 경우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청원자는 "의료사고를 당해 의료분쟁 조정 중이지만 상대방이 응하지 않으면 조정이 불가능해 결국 민사 소송을 해야 한다"며 "과실에 의한 피해를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는데 환자가 대응하기 너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의료과실' 입증책임은 환자가…"과실 입증 어려워"

현행법상 의료 분쟁시 의료진의 과실은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비전문가인 환자가 의료 과실을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진료 기록 등이 모두 병원에 있는데다 의사에 비해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 이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의료소송은 피해자가 이기기 힘든 대표적인 소송으로 꼽힌다. 한 로펌 변호사는 "대부분의 판사가 의료 분야의 비전문가인 만큼 판사에게 내용을 쉽게 설명해 이해시킬 수 있는 실력 있는 변호사가 의료소송에서 유리한데, 이런 변호사는 대개 수임료가 높은 병원 쪽에 선다"며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는 의료 소송을 버틸 수 있고 대형 로펌을 쓸 수 있는 병원 측에 유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입증 책임을 의사에게 주는 것 역시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의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김대호 변호사는 "의사에게 의료 과실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라고 할 경우 의료 사고를 우려한 의사들이 위험한 의료 행위를 아예 피할 수 있다"며 "치료를 소극적으로 하게 되고 결국 피해는 환자들이 입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실 현행법 체계 안에서도 입증 책임을 완화해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법원에선 "의료 행위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필요로하는 분야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의사의 의료 행위와 손해 사이 인과관계를 밝히기 어려운 특수성이 있다"며 "문제 증상이 의료과실 이외 다른 원인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간접사실을 증명하면 의료 과실로 추정할 수 있다"는 판례가 나온 바 있다.

김 변호사는 "간접 사실이 증명되면 그 입증이 잘못됐다고 의사가 반박하지 않으면 의료과실이 인정될 수 있다"며 "이같은 판례만 철저하게 적용되더라도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실제 상황에서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입증 책임을 전환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법원은 인과관계가 명백하지 않으면 입증 책임을 전환해주지 않는데, 인과관계가 명백하면 소송까지 가지 않는다"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라고 말했다. 

◇'의료진-환자' 소통이 분쟁해결의 시작…'사과법' 제정이 대안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소송까지 가는 것에는 피해 발생 후 병원 측의 '어떤 잘못도 없다'는 식의 태도가 한 몫을 한다. 안 대표는 "한예슬씨 사건에서 병원이 발빠르게 사과한 것을 보고 의료사고 피해자들 사이에선 '우린 유명인이 아니라서 사과도 못받은 것이냐. 허탈하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전했다.

병원이나 의료진이 좀처럼 사과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실제 의료 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의료 피해를 주장하는 환자에게 도의적인 사과를 한 것만으로도 과실을 인정한 것으로 인정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의사가 유감을 표시하려해도 병원 법무팀이나 보험사 측에서 어떤 대응도 못하도록 막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환자와 의료진 간 불통이 갈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들어 문제를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 대표는 "상황에 대해 제대로 설명만 들었어도 수월하게 분쟁이 해결됐을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사과법'(Apology Law) 제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의료진이나 병원이 의료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환자를 위로하거나 사과를 하더라도 이를 의료 과실을 인정한 법적 증거로 삼지 않는다는 게 골자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의사의 사과가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로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시행 중이다. 울산대의대 예방의학과 옥민수·이상일 교수팀의 '환자안전사건 소통하기의 필요성'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미국 미시간대 의료원에서 환자안전사건 소통하기 프로그램을 시행한 이후 환자 방문 10만건당 월 평균 소송 건수가 2.13건에서 0.75건으로 줄었다.

연구팀은 "환자안전사건 소통하기는 단순한 유감이나 사과 표현 이상의 활동으로, 환자안전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환자와 보호자에게 솔직하게 알리면서 공감 또는 유감을 표하고 사건의 조사를 통해 적절한 보상금을 지급하며 비슷한 유형의 사건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일련의 행위"라며 "의료소송 건수와 관련 비용 감소, 의료진 처벌에 대한 의향 감소 등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적지 않다. 안 대표는 "사고 발생 후 병원 측이 사과와 보상을 약속해놓고, 화장까지 한 뒤 의료과실이 아니라고 말을 바꾸는 경우도 있어 사과법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며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