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양승태 사법부 시절 대법원 수뇌부 인사들을 상대로 강제수사에 착수했지만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검찰이 재판거래·법관과 민간인 사찰 등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대법원 판사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했지만 법원이 영장 청구를 대부분 기각하면서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정권과의 재판거래와 판사·민간인 사찰 등을 했다는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압수수색영장 청구를 대부분 기각했다.

이날 검찰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업무방해 등 혐의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해서만 영장을 발부했다.

검찰 관계자는 "양 전 대법원장, 박 전 법원행정처장, 이 전 상임위원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지만 임 전 차장 외엔 전부 기각됐다"고 말했다. 통상 압수수색 영장은 수사 단초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어서 최소한의 소명만을 요건으로 해 발부율이 90% 이상에 이른다. 전례에 비추어보면 법원의 이같은 무더기 압수수색 영장 기각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검찰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이 자신의 업무용PC를 디가우징한 후 백업한 파일을 갖고 있을 것으로 보고 압수수색을 시도했지만 이날 법원은 "주거의 평온을 침해할 정도의 소명이 안 됐다"며 이들의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장판사는 2010년 서울고법 근무 당시 박 전 대법관을 재판장으로 모셨던 인물이다.

검찰은 이 외에도 사법농단 의혹 관련 문건을 다수 작성하고 인수인계 당일 자신의 PC에서 2만4500개의 파일을 삭제한 의혹을 받는 김모 판사에 대해서도 증거인멸 및 공용서류손상 등 혐의로 자택 압수수색 영장을 함께 청구했으나 법원은 이 역시 기각했다.

그러나 법원이 왜 이들을 제외한 채 임 전 차장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영장만 발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날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봉수)는 임 전 차장의 서초동 자택에 검사와 수사관들을 보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비롯해 자료를 확보했다.

지난 5월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이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양승태 사법부에서 자행된 사법농단 관련 문건들을 폭로한 후 마침내 검찰이 강제수사로 전환했지만 처음부터 수사가 가로막힌 셈이다. 검찰이 사법농단 의혹 관련 압수수색을 시도한 건 지난달 21일 법관사찰·재판거래 의혹과 관련해 수사에 착수한 지 한 달 만이다.

법조계에선 영장 권한을 가진 법원이 순순히 수사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전관 출신 변호사는 "혐의를 받는 당사자가 법원인데, 정작 법원이 그 혐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기묘한 상황"이라며 "법원은 '사법행정권 남용'이라는 미리 설정된 틀 안에서만 검찰이 수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외의 영장은 구속은커녕 압수수색영장조차 안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410개 문건을 검찰에 임의제출했다. 검찰은 이 밖에도 임 전 차장을 비롯해 의혹 문건 작성에 관여한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하드디스크 등 자료 임의제출을 요구하는 한편 대법원 청사 내에서 판사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이미징(복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추가 자료를 확인하고 있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특정 정치인이나 언론사 관련 재판을 별도로 관리한 정황 등 추가 혐의 정황을 확인했지만 대법원은 "410개 문건과 관련성이 적다"며 검찰이 문건을 가져가는 걸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포렌직 과정에서 추출된 파일 중 일부를 매일 검찰에 제공하고 있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