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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리포트

대법관이 된 '30년 외길' 노동 변호사 '김선수'

[the L] [판사 사용설명서-김선수 대법관]


2013년 11월5일, 통합진보당을 없애달라는 위헌정당해산 심판이 청구됐다. 청구인은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 이에 따라 통진당의 운명은 헌법재판소의 손에 맡겨졌다. 통진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이석기 당시 의원은 한달여 전 이 내란 선동·음모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통진당에 대한 국민여론은 나빠질대로 나빠진 터였다.

다급해진 통진당 관계자들은 정당 해산을 막아달라며 '노동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김선수 변호사(57·사법연수원 17기)를 찾아갔다. 당시 김 변호사는 단골 대법관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법관의 꿈을 생각하면 맡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김 변호사의 주변에선 사건을 수임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다. 이념적으로 편향됐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김 변호사는 별다른 고민없이 사건을 떠맡았다.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대법관이 되겠다고 내칠 순 없다"고 했다. 김 변호사의 지인은 "당시 주변에선 '대법관이 되려면 통진당 사건을 맡지 말아야 하다'며 펄쩍 뛰었다"며 "그런데 본인은 그냥 아무 고민 없이 사건을 맡더라"고 회고했다.

김 변호사는 민주국가에서 내란 선동·음모 사건의 유·무죄가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정당을 해산할 수는 없다며 통진당 대리인단을 이끌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헌재는 이듬해 통진당에 대해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통진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4년 뒤 김 변호사는 결국 대법관 자리에 올랐다. 법원행정처에 대법관 기록이 남아있는 1980년 이후 첫번째 '순수 재야' 출신 대법관이다. 이전에도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대법관은 양병호·홍순엽 대법관 정도 뿐이었다. 김 대법관은 지난 8월2일 취임사에서 "순수 변호사 출신 대법관이라는 국민의 관심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정치적 고려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선수 대법관/ 사진=박용훈 인턴기자

◇'평판관리' 관심 없던 '단골' 대법관 후보

김 대법관은 보수 정권 아래에서도 '재야 변호사가 대법관이 된다면 김선수 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수' 대법관 후보였다. 그는 2015년부터 내리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한 대법관 후보군에 올랐다. 대법관추천위원회의 3배수 추천을 받은 것도 이번이 세 번째다. 

그럼에도 김 대법관은 그 흔한 '평판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사건,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이라도 가려 맡지 않았다. 시그네틱스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소송을 의뢰했던 이모씨는 "해고소송 외에도 임금체불 같은 '자잘한' 사건들까지 김 대법관이 직접 맡아줬다. 그것도 거의 무료였다"며 "너무 미안해서 '직접 안 하시고 다른 분께 맡기셔도 된다'고까지 했는데 상관 없다며 끝까지 직접 해주더라"고 했다. 경기대 조교 사건을 맡긴 정모씨는 법무법인 30곳을 돌았지만 모조리 거절 당했다. 그는 "이 사건을 맡을 사람은 김선수 변호사 뿐이란 말을 들었다"며 "처음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맡아주셨다"고 말했다.

그의 좌우명은 '성자 천지도 성지자 인지도(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다. 김 대법관은 "말이 이루어지는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라는 뜻"이라며 "고등학교 담임이셨던 후백(後柏) 김창규 선생님께서 윤리 수업 시간에 가르쳐주신 중용(中庸)의 한 구절"이라고 설명했다. 그에게 '여민(黎民)'이라는 호를 붙여준 것도 김 선생님이다. 여민은 노동으로 살갗이 검게 그을린 서민을 뜻한다.

◇노동 변호사 외길 30년···노동지형을 바꾸다

김 대법관은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우신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27회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노동 현장에 투신한 친구들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오직 노동 변호사를 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 결심대로 김 대법관은 1988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판사·검사를 지망하지 않고 곧바로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했다. 대표적 '인권 변호사'인 조 변호사는 그의 '롤모델'이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창립멤버가 된 것도 이때쯤이다. 

이후 30년간 그는 '노동 변호사'로서의 외길을 걸었다. 숱한 노동 사건을 맡아 때론 이겼고 때론 졌다. 1989년 모토로라와 풍산금속의 해고 사건이 김 대법관이 맡은 첫 사건이었다. 그가 변호한 풍산금속 해고자 중 한 명이 '거리의 변호사' 권영국 전 의원이다.

이후 김 대법관이 이끌어낸 판결들은 우리나라의 노동지형을 바꿔놨다. 1990년 서울대병원 근로자 1021명을 변호한 법정수당 사건은 통상임금에 관한 법리를 정립시키고, 서울민사지법에 노동전담부가 설치되는 계기가 됐다. 2008년 예스코 불법파견 사건에서는 사용자가 파견근로자들을 허용되지 않은 다른 업무에 종사하게 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직접고용'으로 간주되도록 판례 변경을 이끌었다. 김준우 민변 상근변호사는 "골프장 캐디를 비롯한 특수고용노동자 등의 통상임금, 대학 교수의 부당한 재임용 탈락, 콜트·콜텍의 정리해고, 공무원노조 문제 등이 김 대법관의 손을 거친 판례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김 대법관의 변호사 활동을 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김 대법관은 대법관 임명과 동시에 대한변협의 변호사 등록을 취소했다. 대법관 퇴임 후 전관예우의 소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다. 퇴임 후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겠다고 인사청문회에서 답하거나 변협에 서약서를 제출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미 등록된 변호사 자격을 취소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개는 대법관에 임용돼도 변호사 휴업신고로 갈음한다. 

김 대법관은 법조계에선 순수 재야지만 행정분야에선 공직을 거쳤다. 2005년 참여정부에서 신설된 청와대 사법개혁비서관, 대통령 직속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 기획추진단장을 겸임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김 대법관이 주도해 성사시킨 게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 △국민참여재판 도입 △공판중심주의 확립 등을 포함한 형사소송법 개정 등이다. 이때 직속 상관인 민정수석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김선수 대법관/ 사진=홍봉진 기자

◇산이 부른다

숨가쁘게 달려온 그에게도 '쉼터'는 있다. 바로 산이다. 2005년 사개추위 기획추진단장 시절 검사와 판사들에게 술에서도 지면 안 되는 삶을 살았다. 거기에 검찰의 항명 파동까지 겪자 스트레스 해소와 건강관리 차원에서 자택 주변 대모산과 구룡산을 다니던 게 버릇이 됐다.

그는 2007년 공직 퇴직 후 종종 무박으로 10시간에서 14시간 동안 산을 탔다. 밤늦게 서울에서 버스로 출발해 새벽 3~4시쯤부터 산행을 하는 식이다. 헤드랜턴으로 길을 밝히면서 걷는 사실상의 야간 산행이다. 상당 기간 언론에 등산 관련 기고를 하기도 했다.

등산할 때 김 대법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초반에 무리했다간 나중에 일행의 짐이 돼 버릴 수 있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의 한계에 도전하지 않고 땀이 날 만하거나 힘에 부칠 때마다 쉬어버리면 산행의 효과가 없다." 

김 대법관은 '요즘에도 등산을 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작년부터 흔들리고는 있지만 건강관리를 위해 혼자라도 산행을 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답했다.

[인간 김선수]

1. 좌우명: 성자 천지도 성지자 인지도(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말이 이루어지는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2. 종교: 천주교
3. 취미: 등산
4. 주량: 분위기에 맞춰 적정한 수준에서 조절

[프로필]

△제27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 △사법연수원 수료(제17기)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법무법인 시민종합 변호사 △숭실대 노사대학원 겸임교수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 △여민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 △청와대 사법개혁비서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장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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