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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법원'

[the L]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의회가 만든 법, 휴지조각 만드는 美연방대법원…법 바꿀 힘도, 예산 편성할 힘도 없는 '약자' 韓대법원


"단언컨대 어떤 것이 법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권한은 사법부의 영역이자 본분이다." (It is emphatically the province and duty of the judicial department to say what the law is.) 

미국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청사 앞 대리석에 새겨진 글귀다. 1803년 이른바 '마버리 사건' 판결문에 담긴 문장을 옮겨 적은 것이다. 존 마셜 당시 대법원장은 이 판결과 함께 의회가 만든 법원조직법을 휴지통으로 보내버렸다. 미국 사법부가 '위헌법률 심판권', 소위 '사법심사권'을 스스로 확보한 순간이다.

'의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누가 판단할 것인가?' 미국에서 건국 이후 계속돼 온 이 논란은 '마버리 사건' 판결과 함께 사법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사법부가 위헌법률 심판권을 갖는다는 규정은 미 연방헌법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그럼에도 '마버리 판례'를 통해 확립된 이 원칙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이를 통해 미국 사법부는 의회를 견제할 강력한 권한을 틀어쥐며 확고한 '3권분립' 체제를 갖췄다.

행정부가 우위에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의회의 힘은 행정부에 밀리지 않는다. 법률 제·개정권, 고위직 임명동의권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선 대통령에게 있는 선전포고권과 조약비준권까지 갖고 있다. 우리 국회는 FTA(자유무역협정) 등 국제조약에 대해 비준'동의'권을 가질 뿐이다. 결국 미국 대통령은 의회의 견제를 받고, 의회는 연방대법원의 견제를 받는 구조다. 또 연방대법관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행정·입법·사법이 수레바퀴처럼 서로를 견제하는 명실상부한 '3권분립' 체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미국과 달리 우리 대법원은 정부와 국회에 대해 철저한 '을'이다. 한국 대법원은 국회가 만든 법률의 위헌 여부를 따질 권한이 없다. 1987년 개헌과 함께 헌법재판소가 설치되면서 위헌법률 심판권은 헌재의 몫이 됐다. 사법부에겐 법률 제·개정안을 발의할 권한도, 예산편성권도 없다. 법원 행정에 있어 새로운 무엇을 하든 정부와 국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사법농단의 비극은 여기서 잉태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을 꿈 꿨다. 중요한 사건만 대법원이 챙기고, 나머지는 상고법원에서 처리하자는 얘기다.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예순 넘은 대법관들이 1년에 한명당 약 1000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다. 문제는 대법원에 상고법원 도입을 관철할 힘이 없었다는 거다. 기껏할 수 있는 건 정부나 개별 국회의원의 재판에 개입하는 것 뿐이었다. 양승태 사법부가 '재판거래'라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배경이다. 

적폐청산은 3가지로 이뤄진다. 진상규명, 인적청산, 재발방지다. 이 가운데 '사법신뢰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게 '재발방지'다. 또 다시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 있는 시스템을 놔둔다면 이 사건 수사는 하나 마나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재발방지 대책으로 '법원행정처 폐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법원행정처를 법원사무처와 대법원 사무국으로 쪼개고,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권한은 사법행정회의(가칭)에 넘기겠다고 했다. 법원사무처를 대법원과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상근법관도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걸로 충분할까? 사법행정회의가 판사들로 구성된다면 지금과 뭐가 다를까?

헌법재판소가 있는 독일도 사법부에 위헌법률 심판권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일 사법부는 직접 행정부나 의회에 로비를 하지 않는다. 행정부인 법무부가 법원행정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오로지 재판에만 집중한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면 법무부가 법안을 발의하고 직접 의회를 설득하면 된다. 사법부로선 재판거래를 할 이유가 없다. 

독일과 달리 우리나라만 법원행정을 반드시 판사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법률을 바꿀 힘도, 예산을 편성할 힘도 없는 사법부가 법원행정을 쥐고 있는 한 사법농단은 언제든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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