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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리포트

"회장님,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갑니까?"

[the L] [비선실록(秘線實錄) 제23화-하나은행 인사개입] 정찬우 前금융위 부위원장 "자꾸만 수석이 전화하는데 좀 짜증 난다"

편집자주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건의 진실은 뭘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다일까? 수많은 진실들이 검찰과 특검의 피의자 신문조서 등 수사기록 속에 아직 숨어있다. 그 무수한 비밀을 품은 수사기록을 머니투데이 법률미디어 '더엘'(the L)이 단독 입수했다. "그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해답을 방대한 자료 더미 속에서 하나 하나 건져올려 차례로 연재한다. '비선실세'에 대한 '수사기록'을 재구성한 '비선실록'(秘線實錄)이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대통령이 인사에 개입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민간은행의 부장급을 승진시키기 위해 대통령까지 나선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이런 일로 재판까지 간 건 헌정 사상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KEB하나은행 인사개입은 다른 국정농단 사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지만, 이례적인 사건이다.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이 합병하기 한달 전인 2015년 8월. 최순실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딸 정유라의 승마훈련에 대한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당시 외환은행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법인장이던 이상화씨를 알게 됐다. 대한항공 지점장이 현지의 한국계 은행을 찾는 최씨에게 그를 소개해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이씨는 이 만남을 계기로 최씨의 독일 체류와 코어스포츠(비덱스포츠의 전신) 설립·운영 등에 대해 두루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이씨는 은행 업무 외에도 독일 현지 부동산을 알아보거나 회사 상호변경 등의 일까지 도와주며 최씨의 신임을 얻는다. 

이씨는 심지어 '헤드헌터'의 역할까지 했다. 최씨가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직접 소개해주기도 했다. 최씨의 요청을 받고 유재경 전 미얀마 대사, 김인식 전 코이카(KOICA) 이사장 등을 인사 추천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성사는 안 됐지만 대우건설 사장 후보를 추천하기도 했다.

소위 최순실 태블릿 PC에서 발견된 이상화 당시 KEB하나은행 프랑크푸르트 법인장에게 보내는 이메일. 말 구입을 위해 계약금 5만유로를 우선 송금해달라는 내용. "3(삼성)은 결제가 며칠 걸리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 이씨는 훗날 수사 과정에서 해외 지점의 경우 초기 정착을 위해 어려움을 겪는 고객의 민원 해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영업기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는 이미 대한항공 지점장으로부터 최씨를 소개받으면서 청와대와 연결이 닿는 인물이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또 최씨가 삼성 고위층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최씨가 영향력이 있는 인물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신뢰가 쌓인 뒤 이씨는 최씨에게 하나은행의 독일 법인 폐쇄위기 등 본인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그 무렵 하나은행은 룩셈부르크에 유럽통합법인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이씨는 하나금융그룹 회장 비서실에 통합법인을 프랑크푸르트에 두는 게 낫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별도로 보낼 정도로 적극적으로 독일에 남고 싶어 했다. 이는 최씨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최씨 입장에서도 독일 법인이 룩셈부르크 법인으로 통합되면 독일에서 이씨의 도움을 받기 곤란해질 수 있었다. 

하나은행 독일 프랑크프루트 이상화 법인장의 연락처가 적혀 있던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

최씨는 아예 유럽통합법인장에 이씨를 앉히고 도움을 계속 받으려는 생각에 박 전 대통령을 통해 하나은행에 압력을 넣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은 실제로 최씨의 뜻대로 움직였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적은 안 전 수석의 메모는 이후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된다. 2015년 9월13일 박 전 대통령은 안 전 수석에게 '꼼꼼하게' 이씨의 휴대폰 번호까지 전달한다. 갑작스레 청와대 경제수석의 전화를 받게 된 이씨는 '보이스피싱'으로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구체적이었다. 하나은행의 유럽통합법인을 룩셈부르크가 아닌 프랑크푸르트에 설치하고 이씨를 통합법인장에 임명될 수 있게 하란 내용이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18.8.24/사진=뉴스1

안 전 수석은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의 성균관대 후배로, 둘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나 안 전 수석은 김 회장에게 직접 연락하는 대신 금융위원회를 통했다. 안 전 수석의 전화를 받은 정찬우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김 회장에게 "안종범 수석이 이상화를 유럽에 생기는 하나은행 통합법인의 총괄본부장으로 보내달라고 한다"고 그대로 전달한다.

그러나 당시 하나은행은 룩셈부르크 유럽통합법인 설립 계획을 사실상 무기한 보류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청탁 내용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씨를 유럽 총괄본부장 대신 '해외 업무 그룹장' 자리에 앉히라는 수정된 지시가 내려온다. 다시 안 전 수석이 정 전 부위원장에게 연락하고, 그를 통해 김 회장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반복됐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상화는 현재 부장급이고, 그룹장은 부행장급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인사원칙을 이유로 거절했다. 하나은행 직제에 따르면 부장과 부행장 사이엔 본부장, 상무, 전무가 있다. 부장급을 부행장급인 그룹장에 임명하는 것은 3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인사다. 

그러자 안 전 수석은 정 전 부위원장을 통해 다시 실현가능한 수준인 '본부장 승진'을 요구했다. 이에 김 회장 측은 2015년 12월 하반기 정기인사에 반영해보겠다는 답변을 줬다. 하지만 하나은행은 이씨를 2016년 1월7일자로 '본부장' 대신 삼성타운 센터장(지점장)으로 발령냈다.

그러나 이 인사는 불과 한달도 안 돼 뒤집힌다. 하나은행은 그해 2월1일자로 이씨를 본부장급인 글로벌영업2본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청와대의 요구대로 된 셈이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최씨는 이씨가 지점장급의 삼성타운 센터장으로 발령받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실망한다. 그리곤 곧바로 박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 이는 안 전 수석에게 대한 대통령의 추가 지시로 이어졌다.

이쯤되자 안 전 수석도 단단히 화가 났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던 정 전 부위원장도 "자꾸만 수석이 전화를 하시는 데 좀 짜증이 난다"며 김 회장에게 토로했다. '대통령 관심사항'이라는 말까지 전했다.

결국 안 전 수석이 정 전 부위원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김 회장과 통화를 하게 된다. 흥분한 안 전 수석은 통화 중 김 회장에게 면박을 주기까지 했다.

"내가 이상화를 바로 본부장으로 승진시키랬지, 언제 센터장으로 했다가 나중에 본부장 승진을 시키라고 했습니까? 당장 승진시키세요. 무조건 빨리 하세요. 지금 이거 내 이득을 위해서 합니까?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 갑니까?"

그제야 김 회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하나은행의 조직 개편을 단행한다. 글로벌사업그룹에 2개의 본부장 자리를 만들고, 일주일 뒤 이씨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김 회장은 법정에서 이씨의 본부장 승진을 인사청탁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부터 '조직개편'을 하려던 계획을 재검토해 본부장 두 자리를 새로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인사추천위원회를 통해 아래에서 후보가 올라왔고 본인은 추인한 것 뿐이란 얘기다. 하나은행 출신이 글로벌 영업 부문의 높은 자리에 배치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씨 등 외환은행 출신 임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만든 자리란 해명도 곁들였다. 

김인식 전 코이카 이사장이 이상화 전 하나은행 글로벌 2영업 본부장 휴대전화를 통해 최순실에게 보낸 카톡내용. 박 전대통령이 참석한 에티오피아 코이카 행사에 대해 보고 하고 있다. 최씨의 연락처를 모르는 김 전 이사장은 이씨의 휴대전화를 통해 최순실과 연락했다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최씨 측은 인사 청탁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그러나 법원은 최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안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씨가 본부장급으로 승진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인정했다. 인사 청탁 내용을 김 회장에게 전달한 정 부위원장도 이를 인정했다. 대화의 뉘앙스 등을 놓고는 주장이 다소 엇갈렸지만, 전화 통화한 사실과 통화의 주된 내용에 대해선 관련자들 모두 진술이 일치했다.

쟁점은 박 전 대통령이 하나은행 인사에 개입해 이씨를 하나은행 글로벌2본부장에 오르도록 한 것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변호인들은 민간은행 부장급의 인사는 대통령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에 직권남용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법원도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결국 민간인 최씨 뿐 아니라 공무원이었던 박 전 대통령과 안 전 수석도 하나은행 인사개입에 대해 1·2심에서 직권남용 대신 강요죄만 인정됐다.

주목할 건 김 회장이 마지막 순간 청와대의 요구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그 전까지 요구를 수차례 거절했다는 점이다. 금융지주 회장으로서 부당한 요구일지라도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 뿐 아니라 은행 감독권자인 금융위 부위원장의 압력까지 뿌리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점에서다.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 2018.5.10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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