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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빨리 자백하고 자고 싶은데 왜 방해해"

[the L]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동료 수사받자 그제야 '피의자 인권'에 눈 뜬 판사들


"저도 판사일 땐 몰랐어요. 검찰의 밤샘조사가 왜 문제인지…"

최근 사석에서 만난 판사 출신의 변호사가 고백처럼 꺼낸 말이다. "불구속 상태에선 그나마 나아요. 문제는 구속됐을 때예요. 검찰이 자정까지만 조사를 한다고 해도 피의자는 조서를 검토하고 일일이 수정한 뒤 날인까지 해야 하는데, 그게 2시간은 걸립니다. 검찰에서 나와 호송차를 타고 구치소까지 가면 새벽 3시가 넘는 거죠."

여기까진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다. 심야조사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검찰은 "우리는 조사를 자정 전에 마쳤다. 피의자가 조서를 검토하는 데 오래 걸린 것"이라고 해명해왔다. 비교적 덜 알려진 얘기는 다음부터다.

"구치소에 도착했다고 바로 수용실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수용실에 들어가려면 신원확인과 몸 수색 등 온갖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하는데, 그게 1시간반 정도 걸려요. 결국 새벽 4시반 쯤에야 수용실에 들어갈 수 있는 거죠. 그렇다고 바로 잠이 드나요? 수용실에 들어가면 자고 있다가 문 여닫는 소리에 깬 다른 수감자들이 '새벽에 시끄럽게 한다'고 한마디씩 욕을 합니다. 위축되고 긴장된 상태에서 1시간 정도 뜬 눈으로 누워있다 보면 다시 일어나야 됩니다. 구치소는 새벽 6시가 기상시간이거든요. 한마디로 거의 한숨도 못 자는 거죠. 그 상태에서 다시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나가는 겁니다. 잠을 안 재우는 고문과 다를 게 없습니다."

변호사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다. 검사들도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대개 구속되면 며칠동안 잠을 못 자고 조사를 받는 패턴이 반복된다. 검찰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일단 피의자를 구속시키면 최장 구속기간인 20일 내 수사를 마치고 기소까지 해야 한다. 시간이 없으니 단기간내 집중적으로 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피의자가 조사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괘씸죄'의 위험을 무릅쓰고 칼자루를 쥔 검찰의 조사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피의자가 몇이나 될까? 게다가 이미 구속돼 구치소에 갇히고, 동료 수감자들의 텃세와 검찰의 압박에 시달리며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한 터다.

그렇게 며칠동안 잠을 못자면 어떤 상태가 될까? 수면이 부족해지면 이른바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의 분비가 줄어든다. 이는 사고력을 주관하는 뇌 전두엽의 기능 저하로 이어진다.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워져 주의력이 떨어지고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 본능이 이성을 압도하고, 한시라도 빨리 조사를 끝내고 쉬고 싶은 욕망이 처벌의 두려움을 앞선다. 범행을 부인하던 피의자들이 구속 후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자백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다. 며칠동안 한숨도 못 자고 검찰의 조사를 받은 한 구속 피의자가 검찰 앞에서 갑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변호사가 이를 제지하자 피의자가 벌컥 화를 내며 자신을 돕는 변호사를 발로 걷어찼다고 한다. 빨리 자백하고 구치소로 돌아가서 자고 싶은데 왜 방해하느냐면서.

최근 전·현직 판사들 사이에서 검찰 심야조사에 대한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달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이후다.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검찰의 '밤샘조사' 관행을 비판하며 "조서 증거 능력부터 부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법원 내부게시판에 올렸다. 다른 전·현직 판사들도 사석에서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검찰도 할 말이 있다. 한 검찰 간부는 "우리도 심야조사가 싫다"며 "피의자들이 여러번 오는 것보다 한번에 많은 양을 조사받길 원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검찰의 책임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심야조사의 진술이 증거가 되니 안 되니 하는 논란이 싫다면 자정이 아니라 밤 9시 정도만 돼도 검찰이 먼저 돌려보낼 일이다.

문제는 전·현직 판사들이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밤샘조사의 문제가 하루이틀된 것도 아니다. 평소에 이런 주장을 했다면 진정성 있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가만 있던 판사들이 선배·동료가 검찰에 불려가고 구속되자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직접 당해본 뒤에야 비로소 '인권'에 눈을 뜬 판사들을 보며 뒷맛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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