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회유와 협박에 의해 거짓 진술을 했다는 고(故)한만호씨의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한명숙 전 총리 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가 나오는 가운데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족들도 재심 청구 의사를 밝히는 등 최근 '재심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사법부가 피해자의 고통이나 검찰의 잘못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무리한 재심 청구는 자칫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재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르익기도 전에 정치권에서 당파적 이유로 언급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재심 청구 요건, 법으로만 따져봤다 대표적인 재심 사건은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75년 제정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행위 등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이를 위반한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조항은 2013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받았고, 이에 따라 피해자들의 재심 청구와 손해배상 청구가 이어졌다. 즉 처벌할 법규 자체가 사라졌으니 이 조항으로 유죄판결을 내린 재판은 재심을 거치는게 마땅하다.

이처럼 재심 이유가 너무나 명백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조계에서는 사실상 재심 판결이 열리는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고 말한다. 문턱이 매우 높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뒤집으려면 사실상 앞선 절차인 1·2심 뿐만 아니라 기소 전 검찰 수사과정까지 사법의 전 과정이 부정되는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심리 자체가 매우 어렵다는 지적이다.

긴급조치 9호 재심 당시 국선변호인을 맡았던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예현)는 "쉽게 말하면 월드컵 경기가 끝났는데 심판의 부정 등 여러가지 이유로 16강 경기를 다시 하자는 것과 비슷하다"면서 "당시 16강 결과를 바탕으로 8강과 4강 등을 한건데 이를 되돌리자면 문제가 매우 복잡해진다"고 말했다.

월드컵에서는 원칙적으로 재경기를 허용하지 않듯이 재판도 원칙적으로 재심 재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형사소송법 420조(총 7개 조항)규정을 둬서 예외적으로 재심을 허용하고 있다.

내용별로 크게 분류하면 △원판결의 서류나 증거물이 위조 및 변조된 것이 확정판결을 통해 증명돼야 하고(1항) △고소인이 무고를 했다는 점이 확정판결을 통해 증명돼야 하고(3항) △무죄 등을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될때(5항) △판결에 관여한 법관이나 수사에 관여한 검사·경찰이 직무 관련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된 때(7항)에 한한다.

즉 '의혹' 정도가 아니라 모두 각각의 다른 재판에서 확정판결 받아야 재심이라는 걸 청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화성 연쇄살인 8번째 사건으로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윤모씨에 대해 법원이 재심을 결정한 근거는 5항으로, 유력한 용의자 이춘재의 자백이 '명백한 근거'가 됐다.

한명숙 사건, 재심 청구 가능할까?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대법원에서 확정받은 한명숙 전 총리 사건에 대해 재심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형사소송법 420조 7항을 근거로 재심을 주장한다.

뉴스타파가 고 한만호씨 비망록을 입수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한씨가 법정에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고 진술했고 이는 당시 유죄의 증거가 됐다. 하지만 한씨가 "사실 검찰의 강압수사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다"고 이야기한 사실이 비망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또 대법원 판결 당시 한 전 총리의 유죄를 확정하면서 일부 대법관들이 반대 의견에 "검사가 한씨의 진술이 번복되지 않도록 부적절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한 사안"이라고 지적한 부분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것은 7항의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된 때'인데, 이를 근거로 여권 일각에선 '공수처 대상 1호'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 당시 한 전 총리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 등의 직무관련 범죄 혐의가 드러나 수사가 개시되고 재판에 넘겨져 유죄판결이 확정돼야 하는데 현실성이 높지 않다. 한명숙 사건은 재심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대검찰청 산하 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 조사를 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법무부도 재심 보다는 일단 먼저 진상조사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구체적인 정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명숙 사건에 이어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10·26 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족인 여동생이 서울고법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 김 전 부장의 살해 동기가 내란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사건 역시 공소시효가 지난데다, 재심의 선결요건인 확정판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역사를 바로 세우거나 정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하는데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지 의문"이라며 "정치권에서 당파적 이익에 치중해 재심 카드를 들고 나오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