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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법정에서…'소머즈'의 추억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1970년대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미국 TV 드라마 '더 바이오닉 우먼'에서 소머즈 역할을 맡았던 린제이 와그너가 2016년 1월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열린 TV 비평가협회(TCA) 주최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소머즈는 기계장치를 이식해 먼 곳의 소리를 듣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사건을 해결한다. /AP=뉴시스

기자들이라고 해서 청력이 유난히 뛰어난 건 아니다. 닫힌 문 너머 회의실의 희미한 대화를 엿듣는(?), '소머즈' 수준의 '귀대기'로 특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들릴 듯 말 듯 아리송한 말소리에 애를 태울 때가 더 많다.

십수 년 전 초년기자 시절 '의견'을 '이견'으로 잘못 듣고 오보를 낼 뻔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여당 지도부의 권력 쟁투가 치열하던 상황에서 핵심 3인방 사이에 '이런 의견이 있다'는 말을 '이견이 있다'로 듣고 보고했다가 혼쭐이 났다. '의'와 '이'. 사투리가 섞이면 더 알아듣기 어려운 말에 대형 사고를 칠 뻔했던 경험이다. 한 획 차이지만 의미의 너울차가 크다.

단둘이 가까이에서 얘기를 나누더라도 제대로 알아듣는 건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다. 모두가 방송국 아나운서처럼 표준 발음으로 듣기 편하게 말하는 것도,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대화하는 건 아니기에 숨소리까지 복기해내는 수재들도 내용을 엉뚱하게 이해하는 경우가 흔하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가 동독 정부 대변인의 기자회견에서 벌어진 말실수와 기자들의 오해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법조계를 출입하면서 비슷한 경우를 꼽으면 역설적으로 법정이 그렇다. 말 한마디, 점 하나에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곳이지만 익숙지 않은 법정 용어와 낯선 형식의 판결문이 때론 웅얼거리는 듯한 재판관의 낭독과 겹치면 신참 기자는 물론, 법조 바닥을 어느 정도 쓸고 다녔다는 기자들도 '멘붕'을 겪는 곳이 법정이다.

언론계에 몸담은 사람으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유죄를 무죄로, 무죄를 유죄로 잘못 써 뒤늦게 수정한 기사를 숱하게 목격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가 지난달 2일 그림을 첨부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쓴 '이지 리드 판결문' 일부. /사진제공=서울행정법원

매일 24시간 법정 취재를 업으로 삼는 기자들도 이런 상황이니 평생 법원 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더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법조인들이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려고 일부러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를 쓴다는 말이 나왔을까.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사법에 대한 거리감이 고스란히 반영된 얘기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서울행정법원이 쉬운 용어로 쓴 판결문(이지 리드 판결문)이 화제가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부장판사 강우찬)가 지난달 2일 작성한 첫 이지 리드 판결문에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딱딱한 문장 대신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는 일상 표현이 쓰였다. 재판부는 판결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각자 다른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경기를 관람하는 삽화도 넣었다.

쉬운 용어 논의가 먼저 진행된 북미와 유럽 법조계에서는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판결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대법원은 2021년 11월 발달장애인이 당사자인 사건에서 재판의 쟁점과 과정을 한 문장마다 15개 안팎의 단어로 쓴 7쪽짜리 요약문을 공개했다. 판결의 내용은 7문장을 넘기지 않았다.

"법정에 서는 사람은 누구나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뿐 아니라 재판을 완벽하게 이해할 권리가 있다."

2015년 8학년을 겨우 마친 29세 캐나다 원주민 청년의 절도 사건 재판에서 쉬운 판결문을 써 주목받았던 재판관의 판결문 일부다. 잘 들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판결문을 쓰겠다는 우리 사법부의 시도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아리송한 말에 진땀을 뺀 건 십수 년 전 당시 기억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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