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 리포트

[세상을 바꾼 판결③] "이혼 때 빚도 재산분할"

[the L] "여성도 책임질 건 지고, 요구할 건 한다" 양성평등 기여한 판결

편집자주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최종심급이다. 특히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 이후 모든 판결의 가이던스가 된다. 오는 25일 퇴임하는 양승태 대법원장도 6년간의 임기 동안 수많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남겼다. 그 중엔 세상을 바꾼 의미 있는 판결도, 논란을 남긴 아쉬운 판결도 적지 않았다. 머니투데이 법조팀(the L)이 법학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추려낸 양승태 대법원의 '세상을 바꾼 판결들'과 '논란의 판결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부부 사이에 남은 게 빚밖에 없어도 나눌 것은 나눠야 한다.'

2013년 6월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당시 대법관)가 허모씨 부부 사건에서 내놓은 판결의 요지다. 대법원은 "내 빚을 재산분할을 통해 남편과 나누겠다"는 아내 오모씨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오씨의 청구를 기각한 하급심의 판결은 잘못이라고 했다. 부부 재산을 모두 합쳐도 '마이너스'라면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게 종전 판례였는데, 이를 뒤집은 것이다.

오씨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남편 허씨를 뒷바라지하느라 3억원의 빚까지 냈다. 그러나 허씨는 오씨의 후배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오씨는 이혼 소송과 함께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청구했다. 1·2심은 오씨의 손을 들어주고 허씨가 위자료 5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문제는 "남편과 빚을 나누겠다"는 오씨의 재산분할 청구를 인정할지 여부였다. 당시 부부의 총 재산은 1억9000만원이었지만 빚은 2억3000만원에 달했다. 1·2심은 남은 게 빚밖에 없어 나눌 것도 없다며 오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오씨는 납득할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했고 결국 이겼다. 

◇돈 벌고 대출 받는 여성들

재산분할 청구는 애초에 남성보다는 여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제도다. 과거 가정의 경제권은 남편에게 집중돼 있었다. 대부분의 재산이 남편 명의였고, 빚을 져도 남편이 졌다. 같이 키운 재산이라도 남편 명의로 돼 있으면 부부별산제에 따라 일단 남편 재산이었다. 아내들의 경제활동능력은 취약했고, 이혼 후 생활고에 빠질 우려가 컸다. 재산분할 청구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1990년 민법 개정과 함께 도입됐다.

경제활동이 남성 중심으로 이뤄지던 때까지 제도는 큰 탈없이 작동했다. 벌이도, 재산도, 빚도 남편 쪽 일이었으니 남은 게 빚밖에 없어도 따질 게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오씨처럼 돈을 벌면서 남편 또는 가정을 위해 거액의 대출을 받는 여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빚을 졌는데"라는 하소연하는 여성들이다.

대법원은 이 같이 변화된 시대상을 고려해 판례를 뒤집기로 결정했다. 대법원은 "소극재산(빚)의 총액이 적극재산을 초과해 재산분할의 결과가 채무의 분담을 정하는 것이 되는 경우에도 법원은 재산분할 청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며 "그것이 당사자 사이의 실질적 공평에 부합한다"고 했다.

다만 대법원은 "일체의 사정을 참작해 분담하는 게 적합하다고 인정되면"이란 단서를 달았다. 빚이 무조건 재산분할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해석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가사 사건이 워낙 변수가 많아 어느 정도는 담당 재판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본 것으로 풀이된다.

◇"부부라면 빚이든 재산이든 공동책임" 양성평등 의식 신장

이 판결은 양성평등 의식을 신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정상담 전문가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장은 "이전까지 경제적 책임은 대개 남성 몫으로 인식됐지만, 판결 이후 경제 문제는 공동책임이라는 인식이 많이 늘어났다"며 "여성들이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요구할 것은 요구한다는 권리의식을 더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부부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동반자의 개념으로 나가야 함을 시사한 판례"라고 했다.

법무법인 바른의 김상훈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로 이제 부부는 육아와 가사, 경제활동 모두 공동으로 하는 관계로 정의된다"며 "부부생활 과정에서 생긴 것은 빚이든 재산이든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남녀평등 의식 아래 기존 판례를 정반대로 뒤집은 판결"이라고 평했다.

'결과가 정의에 반하는' 경우가 없도록 법 해석을 바로잡은 판례라는 평가도 있었다. 가사 전문 이현곤 변호사는 "이제 채무도 갚아야 할 채무와 갚지 않아도 되는 채무로 나뉘지 않느냐. 단순 계산만으로 재산분할 청구가 가능한지를 따지기는 어렵게 됐다"며 "재판부가 채무의 성질과 같은 세부적인 사항까지 고려해 재산분할을 결정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의를 추구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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