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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만 무성, 확인은 '0'…'급발진 미스터리' 풀려면

[the L][Law&Life-급발진의 진실①]"입증 책임, 소비자 아닌 제조사에"

의혹만 무성, 확인은 '0'…'급발진 미스터리' 풀려면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차가 왜 이러지? 아이고, 아이고! 아기, 아기, 아기!"
('부산 싼타페 참변' 당시 블랙박스에 녹음된 운전자·동승자의 말)

한순간이었다.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차는 멋대로 속도를 내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지난해 8월 부산에서 발생한 싼타페 차량 사고로 운전자 한모씨를 제외한 일가족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속력은 90㎞ 수준이었고 차가 전복되지 않은 점에 비춰 한씨의 과실로 볼만한 정황은 없었다. 더욱이 한씨는 한때 택시도 몰았던, 운전경력 20년을 자랑하는 '베테랑'이었다.

지난달 이 사건 유족이 한 대학 연구팀에 의뢰한 급발진 재현 실험에서 사고 원인은 급발진으로 확인됐지만 앞선 정부기관의 발표는 달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차량 파손을 이유로 '감정 불가' 판정을 내렸다. 결국 급발진 여부는 법정에서 가리게 됐다. 유족은 지난 7월 현대자동차와 부품 제조사인 로버트보쉬코리아를 상대로 100억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급발진 미스터리'…인정된 사례 '0건'

의문의 교통사고 뒤엔 매번 '급발진 논란'이 따른다. 급발진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자동차 사고는 한해 평균 99건 발생하고 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난달 국정감사를 앞두고 교통안전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신고된 급발진 의심 사고는 모두 495건이었다. 올해 상반기에도 39건이 신고됐다.

지난달 30일 유명을 달리한 고(故) 김주혁 배우가 탔던 벤츠 SUV 'G바겐'의 경우도 그랬다. 갑자기 속도가 붙은 차량이 인도 쪽으로 돌진하더니 급기야 전복됐다. 경찰은 브레이크등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급발진 가능성을 낮게 봤지만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선명한 타이어 자국이 급발진 의혹을 키웠다. 국과수는 차량 감정을 진행 중이다.

이처럼 되풀이되는 논란이지만 지금까지 급발진이 인정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대법원 판결은 항상 자동차회사 승소로 결론났다. '급발진 미스터리'라 불릴 정도다. 전문가들은 현행 법과 제도가 소비자에게 극도로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면 자동차 제조사의 부담은 적다는 것이다. 결국 정책과 제도가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의혹만 무성, 확인은 '0'…'급발진 미스터리' 풀려면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입증 책임 소비자에 부과, 부당"

우선 입증 책임이 제조사가 아닌 소비자에게 주어지는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내년 4월 시행되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엔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내용이 담겼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법에선 '피해자가 손해발생 사실을 증명한 경우 제조물에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정하고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소비자에게 입증 책임이 온전히 부과된 셈이다.

폭스바겐 소송을 이끄는 등 제조물책입법 전문가로 꼽히는 법무법인 바른의 하종선 변호사는 "입증 자료는 전부 제조사에 있는데 입증 책임은 소비자에게 있는 한 입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도 "운전자가 자동차 결함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수술이 잘못된 이유를 의사가 아닌 환자의 가족이 찾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자동차회사의 승소 판결이 이어지는 건 소비자와 제조사 사이 쥐고 있는 정보의 격차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자동차회사의 협조를 위해 '미국식 디스커버리(증거개시·Discovery) 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소비자와 제조사 양측이 모두 증거를 내야 하고 제출을 거부할 경우 반대측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도록 하는 제도다. 전문가들은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현행 제조물책임법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집단소송제 도입도 필요"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급발진 진실 규명을 앞당길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기업의 책임을 강하게 물을 수 있는 제도 유무에 따라 기업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보장하는 미국에서 발생한 캠리 급발진 사고와 관련, 도요타가 급발진 인정 판결에 따라 모두 40억달러(약 4조4600억여원)를 물어낸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김 교수는 "현 제도상으론 급발진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자동차회사가 물어야 할 벌금이나 배상액이 미미할 것"이라며 "이러니 책임감, 대처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집단소송은 판결의 효력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전체에게 미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증권범죄 이외의 분야에선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책임을 물어야하는 쪽의 불법행위가 중대할 경우 실제로 입증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배상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 논의가 꾸준히 이어진 덕에 징벌적 손해배상의 길은 일부 열렸다. 내년 4월 시행되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엔 '제조물 결함을 알면서도 제조업자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생명, 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힐 경우 발생한 손해의 3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배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김주혁 배우의 사고를 계기로 △사고기록장치(EDR) 장착 의무화 △차량에 대한 디지털포렌식 작업 보편화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EDR은 급발진 여부를 판단할 주요 근거로 쓰이는데 자동차회사가 이 기록을 공개하는 것은 의무지만 장착 자체에 대해서는 정해진 규정이 없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하 변호사는 "사고 전 30초 정도의 기록이 담긴 EDR과 디지털포렌식으로 자동차의 내장 컴퓨터인 ECU를 분석하면 급발진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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