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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해도 '범죄'가 되는 나라

[theL] 헌법재판소, 5년만에 7:2에서 5:4로…위헌 의견 늘었지만


사실을 말해도 '범죄'가 되는 나라
사진=변협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목소리가 '개인의 명예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에 묻혔다. 대한변호사협회 등 변호사단체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개정돼야 한다는 취지의 공개 토론회를 열 정도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인 법조계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해 전향적인 움직임이 있었지만,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달랐다.

헌재는 '현상 유지'를 택했다. 25일 헌법재판소는 청구인 A씨 등이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 형법 제307조 제1항'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표현의 자유 보장하라'더니…정권 교체되니 쏙 들어간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주장'



과거 보수정권 하에선 '나꼼수' 등 표현의 자유를 앞세운 대안 언론이 인기를 끌었다. 그들에 의해 비판을 받던 기관과 고위직들은 팟캐스트 방송이나 유튜버 등을 대상으로 고소·고발에 나선 바 있다.
이에 정권 교체 뒤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폐지되거나 '위헌'판단을 받을 거란 전망도 나왔었다. 폐지 주장을 하던 이들은 주로 진보단체로 현 여권과도 친밀했다.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이 같았다.

하지만 현 정부가 '가짜뉴스 엄벌'을 들고 나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현 정부의 '가짜뉴스 폐단론'이란 새로운 프레임 속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주장이 과거와 달리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치인 관련 사건에서 명예훼손 범죄로 우종창·변희재 등 전현직 언론인이나 유튜버 등이 '구속'까지 되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을 말해도 '범죄'가 되는 나라
불구속기소된 인터넷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왼쪽)와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면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 총수와 주 기자는 지난 4ㆍ11총선 기간동안 언론인으로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음에도 민주통합당 정동영 후보와 김용민 후보 등을 공개지지하고 대규모 집회 등을 개회한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기소 됐다. 2012.10.22/뉴스1 / 사진=뉴스1




"'명예훼손죄'로 구속까지 되는 바뀐 분위기…헌재 판단에 영향 줬다"


헌재가 '합헌' 결정을 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국회 법사위에서 근무했던 한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당연히 폐지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과거 진보 진영에 있었고 민주당도 같은 의견을 가진 정치인이 더 많았지만 정권교체 뒤에 우파 유튜버들에 의한 가짜뉴스 논란이 일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며 "그런 여권내 입장이 바뀐 듯한 정치적 분위기도 여론을 중시하는 헌재에 영향을 줬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국회 내 분위기도 예전같지 않다. 이수진 민주당 의원 등이 관련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오히려 '가짜뉴스'나 '언론개혁'에 더 꽂혀있다. 따라서 당분간 여당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안은 나오지 않으리란 전망이다.

법률전문가에 따르면 미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상당수 선진국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유엔인권위원회도 2011년과 2015년 한국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부당 진료로 내 반려견 아프게 한 병원과 수의사 실명도 못 밝히나"




지난 25일 헌재 전체 재판관 9명 중 4명은 반대 의견을 냈지만 다수인 5명의 합헌 의견으로 해당 조항은 앞으로도 효력을 갖게 됐다. 헌재는 지난해 공개변론까지 열어 찬반 양측의 첨예한 논쟁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번에 헌재가 심리한 사건의 시작은 동물병원에 대한 '불만'이다.

A씨는 2017년 8월 27일 한 동물병원에 반려견을 맡겼다. 이후 A씨는 반려견이 병원에서 부당한 진료를 받아 불필요한 수술을 하고 실명 위기까지 겪었다고 생각해 책 등을 통해 치료를 담당했던 수의사의 실명 등을 구체적으로 공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A씨는 이를 실행에 옮길 경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인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자 A씨는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죄가 돼서는 안 된다"며 표현의 자유 제한 등의 사유로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헌재 재판관 5명 "개인 인격권 보호해야"


헌재 재판관 5명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합헌이라고 봤다. 이들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해 개인의 인격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입법목적의 정당성이 있다"며 "명예훼손적 표현행위에 대한 억지효과를 가질 것이므로 수단의 적합성도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명예는 사회에서 개인이 인격을 발현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라며 "명예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 개인이 다수 의견과 다른 견해를 공적으로 표명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최근엔 명예훼손적 표현 행위가 정보통신망을 통해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이에 대한 실효적인 구제방법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인데다 입법목적을 동일하게 달성하면서도 덜 침해적인 대체수단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사실 적시 표현행위, 형사처벌은 과도" 반대 의견 재판관 4명


반면 유남석, 이석태, 김기영, 문형배 재판관은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문제점은 형사처벌이 국가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이라며 "감시와 비판의 객체가 돼야 할 국가·공직자가 형사 처벌의 주체가 될 경우 건전한 감시와 비판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어 "진실한 사실을 토대로 토론과 숙의를 통해 공동체가 자유롭게 의사와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며 "공적사안 등에 있어서도 진실한 사실 적시 표현행위를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에 포함시키면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가 형해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진실한 사실 적시에 대한 형사처벌을 통해 보호하려는 사람의 명예는 진실이 가려진 채 형성된 '외적 명예'에 불과하다"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한 사실을 적시하는 표현행위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헌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들 4명의 재판관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규정힌 대상조항은 과잉금지원칙에 반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결론내렸다. 특히 대상조항 중 ‘진실한 것으로서 사생활의 비밀에 해당하지 아니한’ 사실 적시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일부 위헌'결정이라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5년만에 7:2에서 5:4로 진전은 있지만…다음엔 '위헌' 가능할까


사실을 말해도 '범죄'가 되는 나라
/사진=뉴스1




이번 헌재 결정은 '합헌'이었지만 이후 다시 헌법소원이 제기될 경우엔 '위헌'이나 '일부 위헌'이 나올 가능성은 높다는 퍙가도 있다. 결정문도 헌재의 공식 결론인 5명의 재판관 의견은 10페이지에 서술된 반면, 4명 재판관의 반대의견은 11페이지에 걸쳐 오히려 더 길게 작성됐다.

형사법 전문가인 한 변호사는 "헌재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부작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고 있는 추세를 인식하고 있어서 절묘하게 5대 4정도로 결론 내린 것으로 보인다"며 "일반 형법상 명예훼손에 대해 헌재에선 처음 다뤄진만큼 이후 두 세번의 헌법소원이 시간차를 두고 이어지고 대안마련이 확실히 된다면 뒤집힐 가능성은 높다"고 설명했다.

이찬희 전 변협 협회장은 지난 2019년 관련 토론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현실에서는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기가 어렵다"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일반 형법'에 규정된 '일반 명예훼손죄'에 관한 판단이었지만 앞서 2016년 2월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같은 취지의 내용을 담은 정보통신망법 70조1항에 대해서도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당시엔 7:2로 합헌 결정을 했다.

헌재 재판관들 구성이 달라지면서 5년 만에 7:2에서 5:4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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