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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판례씨] "시킨 대로만 한 것이 잘못" 손해배상 청구한 고객

[the L] 대법, STX팬오션 기업어음 관련 KB증권 vs 신한투자 소송에서 신한투자 승소 판결


위탁자와 수탁자의 관계는 참 모호하다. 위탁자 입장에서야 수탁자가 자신이 지시한 것 이외의 것까지 척척 알아서 해주면 좋겠지만, 수탁자 입장에서는 자의적으로 위탁자 지시를 해석하는 게 위험하다. 자칫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고 책임을 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탁자가 시키는 대로만 해서 위탁자가 손해를 봤다'는 이유로 제기된 소송이 있었다. 소위 '전문투자자'와 '전문투자자' 사이의 소송이다. 위탁자가 '지침'을 내렸다더라도 전문가인 수탁자가 알아서 손해를 피할 수 있게 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신탁업자에게 요구되는 선관주의 의무의 수준을 다룬 대법원 판례(2019년 7월11일 선고, 대법원 2016다224626)를 소개한다.

현대증권(나중에 KB증권으로 합병이 됐다)은 2012년 2월 신한금융투자와 500억원 규모, 계약기간 1년의 신탁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증권이 맡긴 500억원을 신한투자가 현대증권 지시 등에 따라 운용해 1년 후 신한투자가 자신 몫의 보수 등을 떼내서 나머지를 현대증권에 되돌려주는 등 내용이다.

당시 현대증권은 신한투자에 △환매조건부 채권 △자유금리 CP(기업어음) △제1금융권 발행어음 △예금 등 방법으로만 운용하되 CP로 자금을 운용할 때 편입(매수) 대상 CP의 신용평가 등급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신한투자는 그 해 10월 중순 STX팬오션이 발행한 액면가 50억원 상당의 CP를 47억5600만원 가량에 사들였다. 만기까지 액면가와 매입가 만큼의 차익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당시 STX팬오션에 대해 국내 신용평가기관들이 부여한 등급은 A2로, 현대증권이 신한투자에 설정한 조건의 하한에 부합하는 조건이었다. A1이 신용등급이 가장 높고 A2, A3, B, C 등 순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STX팬오션 자체가 부실로 경영이 악화일로를 걷던 상태였다는 데서 발생했다. 당시는 글로벌 해운업 경쟁격화로 운임하락 등이 지속돼 해운업계가 고전하던 때였다. STX팬오션은 같은 해 12월 평가등급이 A3+로 한 단계 낮아진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물론 신한투자가 STX팬오션 CP를 인수한 당시에는 등급 하향조정이 없었다. 그러나 STX팬오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이듬해 6월의 평가등급은 D등급으로 고꾸라졌고 회생절차를 밟기에 이르렀다. D등급은 '상환불능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현대증권은 2014년 3월 신한투자를 상대로 STX팬오션 CP 매입액 전부에 해당하는 47억5600만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자신들은 신탁재산으로 편입할 수 있는 CP의 등급을 A2 이상으로 지정해뒀음에도 신한투자가 자신들의 지시를 위반해 부실기업의 CP를 인수함으로써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현대증권은 또 신한투자가 당시 자본시장법, 신탁법상 '선관주의 의무'와 '충실의무' 등 규정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 대기업 지주사가 회생절차를 신청하는 등 시장상황이 불확실하기도 했던 데다 △STX팬오션에 대한 당시 시장 평가가 비우호적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신한투자가 STX팬오션 CP를 편입한 것은 전문투자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원심은 △신한투자가 현대증권에 부담해야 할 선관주의 의무, 충실의무의 수준은 일반투자자로부터 자금을 투자받는 경우보다 완화된다고 봤지만 △실제 계약내용은 물론이고 당시 시장 안팎의 STX팬오션에 대한 평가 등을 고려하더라도 2012년 10월 신한투자가 STX팬오션 CP를 인수할 당시 당연히 손실이 예견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신한투자가 선관주의 의무, 충실의무를 위반하지 않았고 손해배상 의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판단에 불복해 현대증권(상고 시점에는 원고명이 KB증권으로 바뀌었다)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도 승패소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대법원은 일단 원심에서 전문투자자인 현대증권으로부터 수탁을 받은 신한투자에 요구되는 선관주의 의무, 충실의무가 일반투자자로부터 자금을 투자받은 때에 비해 완화된다고 전제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돈을 맡긴 투자자가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는 일반투자자이거나 전문성이 매우 높은 전문투자자인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선관주의 의무, 충실의무는 강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대법원은 "신한투자가 2012년 10월 STX팬오션 CP를 매수해 편입한 것은 'A2 등급 이상의 기업어음'만 신탁재산에 편입하라는 현대증권(KB증권)의 지시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고 당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현대증권 신탁재산의 최상의 이익에 합치된다는 믿음 하에 한 행위로 볼 수 있다"며 "이후 STX팬오션에 대해 회생계획이 인가됨으로써 원고의 채권이 일부 면제되는 등 신탁재산에 손실이 발생했다는 결과만 들어 신한투자가 신탁업자로서의 선관주의 의무와 충실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신한투자가 최초로 문제가 된 CP를 매입한 때로부터 8년9개월만이자 현대증권이 최초로 소송을 제기한지 5년4개월만에 신한투자의 승소가 확정된 것이다.

◇관련조항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제102조(선관의무 및 충실의무)
① 신탁업자는 수익자에 대하여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신탁재산을 운용하여야 한다.
② 신탁업자는 수익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당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신탁법 제32조(수탁자의 선관의무) 수탁자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注意)로 신탁사무를 처리하여야 한다. 다만, 신탁행위로 달리 정한 경우에는 그에 따른다.

신탁법 제33조(충실의무) 수탁자는 수익자의 이익을 위하여 신탁사무를 처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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