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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이 함께 잘못했다’는 대답에 웃어 버린 군신과 관용

[the L][남 변호사의 삼국지로(law)]⑲

편집자주게임과 무협지, 삼국지를 좋아하는 법률가가 잡다한 얘기로 수다를 떨면서 가끔 진지한 내용도 말하고 싶어 적는 글입니다. 혼자만의 수다라는 옹색함 때문에 약간의 법률얘기를 더합니다.


잘못했다’는 대답에 웃어 버린 군신과 관용



촉을 취하면서 연승을 거두자 유비는 즐거운 마음에 부성에서 대연회를 열었으나 방통이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즐거워 하는 것은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라고 간하자 취한 유비는 주무왕을 언급하며 방통에게 화를 내고는 연회에서 방통을 쫓았습니다.

곧 후회한 유비가 방통을 다시 자리로 불러 방통에게 ‘방금 누가 잘못한 것이냐'를 물어 방통이 ‘군신이 함께 잘못하였습니다’라고 얘기하자 유비는 크게 웃어 버리고 처음처럼 연회를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유비가 촉을 침공한 것은 사실이라 방통이 틀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지만,

방통은 즐거운 연회 중에 꼭 그 순간이 아니더라도, 제장들이 보고 있는 대연회 중에 꼭 그 자리가 아니더라도 유비에게 하고자 하는 얘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테니 술까지 취한 유비가 화를 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비 역시 방통의 얘기가 다소 언짢았을 수 있겠으나 대업을 위해 영입한 인재인 방통이 틀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는 연회에서 방통을 쫓을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직전의 일에 관해 함께 웃어 버리고 말았으니 서로가 서로를 탓하기 보다는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잘못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먼저 돌아 보았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했다’는 점, 이번 주에는 관용을 얘기하고자 합니다(‘용서’와 비슷한 의미로 ‘관용’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오늘 얘기하는 ‘관용’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교와 구교의 첨예한 대립에서 그 대립을 극복했던 프랑스가 ‘똘레랑스’(Tolerance)로 대변되는 단어로 역사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관용은 ‘다름을 이유로 상대방을 배척’하여 퇴행하거나 답보하는 세상을 만들기 보다는 ‘다르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시대의 정신이자 인류의 덕목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연일 신문과 뉴스에 오르내리던 죽음이 있었습니다.

‘성범죄의 피의자(가해자)다’, ‘조문하지 않겠다, 피해자의 편이 되겠다’, ‘죽음은 안타깝지만 잘못을 덮을 수는 없다’, ‘죽음으로 책임을 회피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망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망인의 삶을 돌아 보라’, ‘잘못이 있다 해도 그의 삶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죽음으로 대답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할 말이 있으니 논쟁이 시작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서로 할 말’ 중 내가 할 말만을 보기 보다는 ‘상대방이 할 말’을 한 번 보면 어떨까요?

‘망인에 대한 예의나 망인의 삶’을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 ‘망인은 잘못이 없다, 망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소인(피해자)을 원망한다, 망인이 되었으니 무조건 덮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소인(피해자)에 대한 배려, 망인의 잘못’을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 ‘망인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 조문하는 것이 잘못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관용이 필요한 부분인데 관용의 눈으로 보았을 때야 비로소 불필요한 공격과 비난보다는 차분한 성찰이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적은 얘기가 다른 의견을 말하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망인이 잘못했다는 점을 전제하더라도) 망인과 고소인에 대한 관용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망인에 대한 관용이라 하여 ‘세상에 없으니 망인의 잘못을 덮자, 망인의 잘못을 언급도 하지 말자’라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 그 공과에도 불구하고 망인이 세상과 이별을 고하는 그 몇 일 동안 만큼은 잠시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직전까지 나와 같은 생명이었던 망인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고소인(피해자)에 대해서도 ‘참을 만큼 참았겠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의도치 않게 망인에 대한 추모로 고소인(피해자)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치관에 따라 결론이야 얼마든지 다를 수 있겠지만 다른 결론으로 인한 논쟁 속에서도 고소인(피해자)이나 유족이나 그 중 어느 한 쪽과 함께 하려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관용의 마음이 깃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럼에도 결론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나요?’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네요.

일단 욕 먹을 수도 있겠지만 용감무쌍하게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는 필자에게도 관용을…

결론이요? 명확한 결론이야 있겠습니까만 관용과 함께 한 차분한 성찰이 있은 후라면 자연스레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요?

조사 또는 수사 후 사실관계가 드러나겠지만 개인적으로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망인에 대한 관용이 필요했다는 생각입니다만,

이런 생각은 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추모의 감정일 뿐 고소인(피해자)에 대한 원망이나 아쉬움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평면의 감정입니다.

이미 망인이 세상에 없어 온전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철저하고 공정한 조사와 수사를 통해 오랜 고통 속에서 인간적 사과와 행위에 대한 책임을 원했던 고소인(피해자)의 마음이 부족하나마 위로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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