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인생의 벗으로 우정을 나눠왔습니다. 호의와 배려로 받은 것입니다."

공짜 주식과 회사 차량, 여행 경비 등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검사장이 '그것은 선물이었다'며 한 말입니다. 대학 때부터 친구였다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받은 혐의로, 다른 사람은 준 혐의로,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준 친구의 얘기는 조금 다릅니다.

"공소 사실 관계를 인정합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줬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받은 사람은 '벗이 준 호의와 배려로 준 선물'이라고 하는데, 준 사람은 '나중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 준 뇌물'이었다고 답한 셈입니다. 사람 마음이 다 같을 리 없고, 내 마음도 모르는데 남에 마음까지 알기는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선물과 뇌물. 참 오래된 난제입니다. 돈이며 물건에는 꼬리표가 붙어있지 않은 까닭에 주고받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뇌물'이 되기도 '선물'이 되기도 하는 거죠. 결국 주고받은 것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법원의 일이 됩니다.

1년 중 '선물'을 가장 많이 주고받는 때는 역시 명절입니다. 이번 추석에도 수많은 선물들이 오고 갔을 겁니다. 명절에 주고받은 어떤 '선물'은 '뇌물'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 처벌을 받은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판사들은 선물과 뇌물을 어떻게 구분했을까요.

80만원 선물세트는 뇌물, 100만원 현금은 선물…왜?

건설업자 A씨는 재건축조합장 B씨에게 추석을 맞아 80만원 상당의 굴비세트와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했습니다. 이들은 "의례적인 선물로 보낸 것이고 답례로 과일을 주고받았다"며 "분명한 선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법원은 "재건축조합장도 주거환경법상 공무원으로 볼 수 있고, 액수가 적고 추석을 맞아 받은 것이라도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따른 선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없어 뇌물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C축산물 유통업체 대표는 명절이면 학교장과 교감, 행정실장 등 교직원들에게 현금과 선물세트 등을 보냈습니다. 2년여 기간 동안 지역 초중고 교직원들에게 4500만원 정도의 현금과 1900만원 상당의 선물세트를 보냈습니다. 대표는 "의례적으로 보낸 선물"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뇌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판사는 "식자재 납품에 결정권을 쥐고 있는 학교장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청탁을 하지 않았더라도 직무와 대가관계가 있는 '포괄적 의미'의 뇌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D전기공사업체 대표는 한국전력공사 직원인 E씨에게 명절 때마다 100여만원의 현금을 건넸습니다. 그리고 한전에서 진행하는 공사입찰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도 했습니다. 법원은 이 돈을 '선물'이라고 봤습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E씨가 입찰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위에 있고 정보를 미리 안다고 해도 D씨가 낙찰을 받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뇌물로 볼 수 없다"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대가성과 직무관련성,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는 얼마나 친한가'

80만원짜리 선물세트는 뇌물이 됐지만, 100만원의 현금은 선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차이가 뭘까요. 이 둘을 가른 것은 '대가성'과 '직무관련성'입니다.

형법 129조는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해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할 때, 130조는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해 부정한 청탁을 받고 제3자에게 뇌물을 주고받게 하거나 요구할 때, 132조는 공무원이 그 지위를 이용해 다른 공무원의 '직무'에 속한 사항의 알선에 관해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때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모두 '직무와 관련이 있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물'과 '뇌물'을 가르는 조건은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얼마나 친한가'입니다.

대법원 판례는 공무원의 뇌물수수에 대해 설명하며 "교분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명백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경우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얼마나 정말로 친한지 '명백'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뇌물이 아닌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매년 의례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등 '정말 친한 사이'라고 인정을 받으면 뇌물이 아닌 선물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 지난해 회계법인 임원들이 국세청 직원들과 술을 마시며 술값과 성매매 비용까지 내줬지만 수사기관은 이를 뇌물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대학동문인 이들이 10여년간 서로 알고 지냈다는 점이 고려됐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고받은 금품에 담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 일이고, 보이지 않는 '우정'의 존재를 확인해야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받고 잠을 잘 자면 선물 그렇지 못하면 뇌물, 언론에 보도돼도 문제없으면 선물 탈이 나면 뇌물, 다른 직위에 있어도 받을 수 있으면 선물 아니면 뇌물'이라는 지침도 있지만, 역시 뭔가 애매합니다.

수천, 수백 년을 이어온 이 어려운 문제를 국민권익위원회가 해결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오는 28일 시행되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은 선물의 범위를 '5만원'으로 못 박아놨습니다. '마음'을 확인하긴 힘드니 '금액'으로 선물과 뇌물을 구분하겠다는 취지인 셈입니다.

명절마다, 기념일마다 '선물'을 하는 이유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일 겁니다. 앞으로는 '얼마짜리' 마음이 아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마음이 담긴 선물을 더 많은 사람들이 주고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 정의의 발로라 하면 받는 일도 정다운 일이고 주는 일도 정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신이 아니라 결단코 정과 의로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에 어떠한 목적이 반드시 들어있는 때가 많다…결단코 물질의 은혜로 양심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1929년 6월13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