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와 특허청이 '한국형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의 특허법 개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ACP(의뢰인-변호인의 비밀유지권, 이하 비밀유지권)' 조항을 놓고 반도체업계와 마지막 줄다리기를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머니투데이 취재를 종합하면 산업부와 특허청이 지난 24일 개최한 비공개 온라인간담회에서 삼성전자 등 반도체업계는 개정안에 비밀유지권이 명문화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로펌이 의뢰기업에 준 법률자문서는 전문가 조사범위에 포함되지 않게 하는 조항을 이번 개정안에 넣어달라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 당사자 양측이 재판에 앞서 미리 증거를 공개(영국·미국식)하거나 전문가의 현장조사(독일·프랑스식)를 통해 증거를 공유하도록 하는 절차다. 국내에서 상대의 특허침해를 입증하기 위한 자료수집이 어렵다는 지적에 2년 전부터 국회에선 디스커버리 관련 법안들이 논의돼왔다.

이번 특허법 개정안의 핵심내용은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현장조사를 통해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 업계에선 이 전문가를 통한 기술유출 우려를 제기했고, 이에 △조사 전에 피고(기업)가 의견을 진술하게 하고(사전방어권) △쌍방이 동의하는 침해·손해액 자료로 조사 대상을 한정하고 △전문가 제척·기피 절차를 신설하는 내용이 추가됐다. 피고기업의 현장조사 거부권은 개정법을 형해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법원이 삭제를 요청했지만, 지난 간담회에서 법조문에 넣기로 합의했다.

피고기업의 방어권조항이 대폭 반영됐음에도 업계가 비밀유지권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국내 특허소송에서 공개된 법률자문 문서가 미국에서 발생한 소송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사진=임종철

미국의 디스커버리는 본격적으로 소송에 돌입하기 전에 소송 당사자들이 사건과 관계있는 증거자료를 청구하고 교환하는 절차다. 양쪽이 필요한 증거를 숨기지 않고 모두 공개해야 하고, 증거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거나 훼손한 경우에는 패소 판결까지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증거를 폭넓게 공유하는 미국에선 대리인과 의뢰인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의뢰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률대리인이 의뢰인을 위해 작성한 문서는 증거로 채택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다른 사유로 이미 공개된 문서에 대해선 미국 법원이 통상적으로 비밀유지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국내에서 증거로 채택·공개된 법률자문 증서가 미국법원에 제출될 경우 해당 국내기업은 미국소송에서 상대보다 더 많은 패를 꺼낸 채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가 비밀유지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는 2020년 조응천 의원이 대표발의한 변호사법 개정안에 담긴 비밀유지권에 대해 "의뢰인이 변호사를 통해 수사자료를 은닉하는 경우 실체적 진실 발견을 통한 사법정의 실현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정부는 전문가 조사과정에서 △조사 대상을 원·피고가 합의 △조사범위를 벗어나는 경우 현장에서 조사거부 가능 △법원이 조사결과 보고서 열람자 제한, 비밀유지명령 가능 등 충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업계의 우려를 최소화한다는 계획이다. 또 조사범위에 대한 세부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규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한편 산업부와 특허청은 내달 중순 디스커버리 관련 국회 토론회를 열고 11월 중 법안논의를 할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