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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비자금은 처벌할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12·12 군사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노태우씨가 1996년8월26일 1심 선고공판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당시 신문에서 '손잡은 內亂'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문민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단행됐던 12·12 군사 쿠데타 심판 과정에서 유명했던 말이 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1995년 시민단체가 쿠데타 주역 전두환·노태우씨를 고발하자 검찰이 내놓은 논리다. 전두환의 5공화국와 노태우의 6공화국 사이에 있었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찰 발표만큼 당시 정국을 강타했다.

얼마 전 뒤늦게 영화 '서울의 봄'을 보다가 그때 그 말이 생각났다. 전씨를 열연한 배우 황정민이 "이 정도 각오도 안 했습니까,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고 말했을 때였다. 성공한 쿠데타는 고도의 정치행위이기 때문에 사법부가 처벌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삼권분립에 위배된다고 했던 검찰의 교묘한 논리를 영화에서 "성공하면 혁명"으로 받았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검찰 발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퇴임 후 김 대통령의 언론 인터뷰 회고다. "그렇게 발표한 검사를 혼내줬습니다. 뭐 독일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래요. 어디서 지식을 알아도 그런 못된 거 배워가지고 써먹고 그런다고. 나는 그거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쿠데타는 쿠데타죠."

김 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특별수사본부가 발족했고 검찰이 재수사를 결정하면서 결국 법정에 선 전씨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쿠데타 동지' 노씨에게는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이 결정됐다. 대법원 선고 10개월 전 1심 선고 당시 한 신문사에 실렸던, 재판장 앞에서 수의를 입은 채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진 제목이 '손잡은 내란(內亂)'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임기 말 단행된 특별사면을 두고 여러 평가가 엇갈리지만 이렇게나마 과거를 반추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이뤄진 사법 처벌 덕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쿠데타 세력에 대한 단죄가 쓰리지만 곱씹을 수 있는 교훈의 전제라는 얘기다. 사법 판결이 사회 정의에 미치는 영향. 대법원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조금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세기의 이혼'으로 불리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앞으로 나올 대법원의 판단이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노 관장 몫의 재산분할액을 세간의 예상을 깬 1조3808억원으로 판단한 핵심 논지 중 하나가 노태우씨가 SK그룹에 시집 간 딸을 통해 건넸다는 비자금 300억원이다.

비자금이 실제 건네졌는지에 대한 주장은 여전히 엇갈리지만 항소심 판단대로 비자금의 실체를 인정하더라도 부친이 불법적으로 조성한 '검은돈'을 딸의 결혼생활 기여로 인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대중이 'SK그룹에 노태우 비자금이 흘러들어갔으니 노 관장에게 재산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판결문에 불법자금을 기여로 인정한다고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불륜에 대한 공공의 분노, 여성의 결혼생활 기여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물론 중요한 가치다. 그렇다고 해서 '성공한 비자금은 처벌할 수 없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 역시 정당할 순 없다. 이건 불법자금을 처벌할 공소시효가 지났다거나 이혼소송에서 비자금 처벌 여부는 핵심이 아니라는 말로 넘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앞서 짚은대로 과거를 반추하고 정당한 오늘을 살며 내일의 태양을 준비할 수 있음은 온전한 사법 판단을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지난 8일 대법원에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상고심이 정식 접수됐다. 대법원의 고심이 깊은 여름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출처=머니투데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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