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조직의 의뢰에 따라 해외 인터넷 전화번호를 조작해 '010' 번호로 보이스피싱 전화나 문자를 할 수 있게 도운 배달원이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지난달 13일 사건을 대구지법에 돌려보냈다.

대구에서 오토바이 배달원으로 일하는 A씨는 지난해 2월 유심을 구입해 갖다달라는 의뢰를 받아 배달했다. A씨가 배달을 마치자 해당 의뢰인은 A씨에게 다시 연락해 "통신중계기와 유심 등을 인근 고시원으로 옮겨주고 휴대폰 공기계에 유심을 꽂거나 교체해달라"고 요청했다.

통신중계기는 유심 칩 여러 개를 장착해 휴대전화 발신번호를 조작하는 기기다. 보이스피싱 전화?문자가 가는 해외 전화번호를 조작해 일반적인 '010′ 번호로 바꾸는 일을 의뢰받은 것이다.

A씨는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해 3월 대구의 한 고시원에서 통신중계기와 유무선 공유기를 1대씩 설치했다. A씨는 유심 51개, 중계기 16개를 가지고 있었고 총 47개의 번호를 관리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A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원과 공모해 다수의 피해자들에게 조작된 번호로 연락할 수 있게 했다며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했다. A씨를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본 것이다. A씨는 자신이 불법적인 일을 하는 건지 의심했지만 비트코인 환전에 필요한 작업이라는 말을 듣고 납득했다고 주장했다.

1, 2심은 A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원과 범행을 공모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A씨가 수상한 행위임을 의심하거나 인식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공모 또는 고의가 있었다는 점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김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원과 공모해 해당 유심으로 피해자들과 전화하거나 문자를 전송할 수 있도록 매개해 전기통신사업법에서 금지하는 '타인 통신 매개 행위'를 고의로 했다고 인정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또 "타인의 통신 매개로 인한 전기통신 사업법 위반죄에서 고의는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 사이의 통신을 연결해준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요할 뿐 통신이 매개된 타인이 그 통신을 범죄에 이용한다는 것까지 인식할 것을 요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