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빌린 돈, 손자·손녀가 갚아야 할까?

엄마 아빠는 상속 포기를 했지만, 그 아들딸, 즉 손자 손녀는 상속포기를 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의 빚은 손자 손녀에게 상속된다. 물론 재산도 마찬가지다.

정현(가명)씨는 지난 2009년10월 민우(가명)씨에게 6억원을 빌려줬다. 민우씨는 2010년 말까지 이를 갚기로했지만, 날짜가 다가오기도 전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민우씨의 자녀들은 상속을 포기하고 빚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현씨는 민우씨의 손자녀들이 상속포기를 하지 않았으니, 할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한다고 소송을 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손자녀가 상속인이 되는지 여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손자녀는 상속인이다. 법적으로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들이 전부 상속을 포기하면 배우자와 손자녀, 또는 직계존속이 공동 상속인이 된다. 만약 손자녀와 직계존속이 없다면 배우자만 상속인이 된다. 이 사건의 경우 민우씨의 자녀들만 상속을 포기해 이들의 자녀인 민우씨의 손자녀들도 할머니와 함께 할아버지 민우씨의 재산 또는 빚을 상속받게 된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들에게 상속포기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더 주도록 했다. 원래 상속을 포기하려면 상속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3개월 안(민법 제 1019조제1항)에 상속포기 신청을 해야 한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상속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느냐'다. 대법원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민우씨의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이 상속인이 된다는 것을 알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봤다. 부모가 상속을 포기해 빚을 면제받으려고 하면서 자녀들에게 상속될 것을 알고서도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법원은 '이들은 이번 판결로 상속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이날부터 3개월 내에 상속포기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들, 즉 아들과 딸만 상속을 포기하면 되는 줄 안다. 하지만 상속은 자녀가 있는 경우 자녀에게, 자녀가 없는 경우(또는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는 손자녀에게 상속된다. 상속 대상은 직계비속(자녀, 손자녀 등 혈연으로 이어진 후손)이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자가 있다면 배우자도 공동상속인이 된다. 이 사건과 같이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자녀들만 상속을 포기하면 배우자와 손자녀들이 공동 상속인이 된다. 만약 빚을 상속받고 싶지 않다면 손자녀들도 함께 상속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손자녀들은 이를 몰라서 상속포기 기간 3개월을 넘겨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만약 민우씨가 빚이 아닌 재산을 6억원 남기고 사망했다고 가정해보자. 자녀는 2명, 손자녀는 3명이 있다. 자녀 2명이 상속을 포기하면 상속권은 손자녀와 배우자에게 있다. 3명이 나눠 상속 받을 것을 4명이 나눠 상속을 받게 된다. 자녀들의 결정에 따라 배우자 상속분이 줄어들 수 있는 셈이다. 즉 피상속인의 자녀수보다 손자녀 수가 많은 경우 자녀들이 모두 상속을 포기해버리면서 피상속인의 배우자 상속분을 줄여버릴 수 있는 것이다.

자녀가 임의로 배우자의 상속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배우자의 상속분을 확대하고 상속권을 강화시키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문제는 결국 입법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일본처럼 배우자의 상속분을 고정비율(1/2 또는 2/3)로 정해두던지, 자녀 전원이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는 배우자가 모두 상속을 받는 것으로 하던지 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 그것이 상속을 포기한 자녀들의 의사에도 부합하고 포기를 하지 않고 상속을 승인한 배우자의 의사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법무법인 바른의 김상훈 변호사는 43회 사법시험(연수원 33기)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다. 고려대에서 친족상속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의 상속법과 신탁법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주로 가사·상속·신탁·가업승계 등을 전문분야로 가족간 가족기업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이슈들을 상담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