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 디자이너

"T사와 경영자문 계약을 맺은 10개월간 T사가 금융기관으로부터 100억원의 자금을 유치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나를 무일푼으로 내쫓으려 합니다.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법원의 현명한 판단 부탁드립니다."

T사의 전 재무이사인 A씨는 사장 B씨를 상대로 "밀린 경영자문료를 지급하라"며 2011년 11월 소송을 제기했다. 2009년 2월 맺은 T사와의 자문 계약은 11월에 종료됐고, 그로부터 벌써 2년이 지났지만 B씨는 자문료를 줄 생각도 않고 있었다.

결국 A씨는 '법대로 하자'고 결심하고 B씨를 상대로 5억3000만원에 달하는 자문료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기본 자문료 5000만원에 조달된 자금 총액의 5%를 추가로 받기로 했던 만큼, 합계 5억5000만원이 자문의 대가라고 A씨는 주장했다. A씨가 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B씨는 자문료로 2000만원만 지급한 악덕 사장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민사소송의 법정에 선 B씨는 오히려 "내가 피해자"라며 억울해했다. B씨는 "A씨가 증거로 제출한 경영자문 용역계약서는 위조됐다"고 반박했다. "자문계약을 맺은 적 없으니 줘야 할 돈도 없다"는 입장이다.

자문계약서 서명 '진실공방'.."원본은 없어"

사건은 순식간에 형사사건으로까지 비화됐다. B씨는 2012년 2월 "계약서를 위조해 소송 증거로 제출했다"며 A씨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소했다. A씨도 "계약서 서명이 위조됐다는 고소는 허위"라며 B씨를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다.

사장의 자필 서명은 위조된 것일까. 서명의 진위를 알려면 문서 필적감정을 해보면 쉽게 풀릴 일이지만, 문제는 A씨가 제출한 자문계약서의 형태였다. A씨는 민사소장을 제출하면서 자문계약서 원본이 아닌, 원본을 스캔한 복사본을 첨부했다.

사본일 경우 필적감정을 거치더라도 필체의 동일 여부만 확인될 뿐 압흔(눌러쓴 흔적) 등이 없어 직접 썼는지 진위 판독이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문서의 신뢰성이 떨어져 사본의 필적감정만으로 위조 여부를 단정 짓기란 힘들다. 애당초 경찰은 사본서류에 대한 필적감정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서명의 진위를 감정하지 않았다.

검찰수사가 미궁에 빠진 상황에서 A씨는 '자문계약서의 서명이 B씨의 서명과 같다'는 사설감정서를 제출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자문계약을 맺었다"는 A씨의 주장이 검찰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B씨는 "다시 수사해 달라"며 항고했고, 서울고검은 '수사가 미진했다'는 이유로 재수사하게 했다. A씨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B씨가 갑(甲)의 횡포를 부리는 것인지 밝혀낼 기회였다.

재배당된 A씨 사건을 맡은 서울동부지검은 A씨가 "결백하다"며 추가로 제출한 서류의 서명 형태에 주목했다. A씨는 "원본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면서 B씨의 서명이 기재된 '여신거래약정서' 등 서류를 여러 장 검찰에 제출했다. 그런데 각 서류에 기입된 서명 형태가 비슷한 정도를 넘어서 필적의 크기 등 세부적인 특징까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이 의심을 샀다.

2008년부터 3년간 T사의 경영총괄이사로서 재정업무를 관리했던 A씨 업무의 특성상, B씨의 인감 및 B씨의 서명·날인이 있는 서류를 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의구심은 더 커져만 갔다.

▲A씨 사건을 재구성한 감정 결과. 흰색 부분은 (1), 검은색 부분은 (2). (1)과 (2)를 동일배율로 촬영해 비교 관찰하고 중첩한 결과 퍼즐조각처럼 정확히 일치했다./자료제공=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문서감정실

'서명 짜깁기' 자작극..여러 서류 서명을 스캔·복사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문서감정 결과, 사건은 A씨의 자작극으로 드러났다.

문서감정관은 각 서명을 동일한 배율로 촬영해 비교하고 반복적으로 겹쳐서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서류마다 크기가 다른 글자 획의 크기를 조절해서 맞춰본 결과 자간 크기, 비율, 간격이 퍼즐조각처럼 일치했다. 사본 계약서에 기재된 B씨의 서명은 다른 여신거래약정서에 기재된 각종 서류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스캔, 복사, 짜깁기의 방법 등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중요한 단서는 또 있었다. 문서감정실에 비교할 서류를 제출할 때, A씨는 기존 민사소송에서 제출한 것이 아닌 새로운 자문계약서 사본을 제출하게 된 것이다. 문서감정관은 1건의 경영자문용역계약이 체결됐는데도 B씨의 서명이 다른 2개의 계약서 사본 파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서감정실 관계자는 "A씨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또 다른 경영자문계약서 사본을 제출했는데, 이런 행동이 자신의 범죄를 확실하게 드러나게 한 증거가 됐다"고 설명했다. 계약서의 스캔파일 생성일자는 2009년 2월16일로 되어 있지만, 컴퓨터를 이용하여 파일 생성일자를 조작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감정 결과를 근거로 검찰이 추궁하자 A씨는 결국 자백했으며 사문서 위조, 무고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0월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A씨가 문서를 위조해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피해자를 무고한 계획적이고 악의적인 범행이라는 점을 꼬집어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5억3000만원을 지급하라'며 A씨가 제기했던 자문료 청구소송을 심리했던 법원 역시 "두 문서상의 서명이 유사한 정도를 넘어서 완전히 일치한다"며 A씨가 서명을 위조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B씨의 손을 들어줬다. 민사소송의 1심에서 졌던 A씨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가 2심 중에 소송을 취하해 사기 미수의 혐의도 적용됐다.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문서감정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