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경 /사진=뉴스1

"이 작품 진짜 형편없구나."

어떤 사람이 미술 전시회에 걸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은 그 작품을 그린 작가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경우에는 처벌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형법이 '사실'이 아닌 평가나 가치 판단, 혹은 의견을 말하는 것을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대법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김현구 고려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를 식민사학자로 비판해 재판에 넘겨진 역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최종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인데요. 이 사건의 경과와 명예훼손죄의 성립 요건, 이번 판결의 의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명예훼손죄에서 말하는 '사실'…'진실'? '팩트'?

이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명예훼손죄의 성립 요건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법 제307조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합니다. 또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진실이든 거짓이든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인데요. 그런데 명예훼손죄에서 말하는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실'이나 '팩트'(fact)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거짓인지 아닌지 구분을 할 수 있는 표현이 '사실'에 해당하고, 이 경우에만 처벌 대상이 되는지 법적인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그간의 판례를 통해 이 같은 점을 확실히 밝혀 왔는데요. 대법원 관계자는 "명예훼손죄에서 말하는 사실은 가치 판단이나 의견 표현에 대치되는 개념"이라며 "구체적인 과거 또는 현재의 사실관계에 관한 보고 내지 진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증거에 의해 입증이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매우 간명해 보이는데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 진짜 형편 없구나"라고 말한 것은 누가 봐도 사실의 적시가 아닌 가치 판단이나 의견 표현에 해당하겠죠. 그런데 문제는 법정에 넘어오는 사건의 대부분은 사실의 적시인지 가치 판단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명예훼손죄로 1·2심에서 유죄 또는 무죄가 인정됐다가 대법원에서 파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판단할 진술이 사실인지 또는 의견인지를 구별할 때는 사용된 언어의 통상적 의미와 사용법, 문제가 되는 말이 사용된 전후 상황과 문맥, 그 표현이 사용된 사회적 상황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라고 주장해" 표현, 명예훼손 될까

이제 이 사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덕일 소장은 2014년 9월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책에서 김현구 교수가 쓴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라는 책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이 소장은 "김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다', '백제는 야마토 조정의 식민지고 야마토 조정이 백제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김 교수가 일본 극우파 시각에 동조했다는 취지의 내용을 자신의 책에 포함한 것인데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 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해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둬 6세기 중엽까지 지배했다는 설입니다. 이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이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이에 김 교수는 이 소장을 고소했고, 이 소장은 결국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당시 검찰은 "김 교수가 자시의 책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고, 일본이 고대사 특정 시기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정 지역을 점령하거나 통치했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이 신봉하는 '일본서기'를 이용해 반박한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이에 대한 1·2심의 판단은 갈렸는데요. 1심은 이 소장이 허위의 사실을 적시해 김 교수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보고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2심은 해당 표현이 허위의 사실이 아니거나, 이 소장의 의견표명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덕일 소장, 최종 무죄 확정…"학문적 논쟁, 형사처벌 대상으로 끌여들여선 안돼"

대법원도 2심 판단을 받아들였습니다. 대법원은 "다른 사람의 글을 비평하면서 사용한 표현이 겉으로 보기에 구체적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형태여도 글의 집필 의도 등을 종합해 볼 때 문제가 되는 표현이 주관적 의견에 해당한다면 처벌을 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 소장이 '김 교수가 표면적으로 백제와 야마토 조정이 대등한 관계인 것처럼 기술했지만 실질적으로 백제가 야마토 조정의 속국인 것처럼 묘사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한 것과 다름없다'는 나름의 논리를 단정적인 문장으로 서술한 것으로 주관적 의견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소장의 책이 기존 주류 학계의 연구성과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전개되는 점, 김 교수의 기술을 인용한 뒤 그 부분의 논리 구조를 설명하고 이 소장의 해석을 제시한 점 등을 고려하면 문제가 되는 표현을 형법이 정한 '사실의 적시'라고 보기 어렵다는 설명입니다. 특히 이는 겉으로는 구체적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형태로 표현이 돼 있어도, 의견 표현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는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대법원은 또 "주장과 의견에 대해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학문적 논쟁과 사상의 자유경쟁 영역에서 다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이 같은 일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함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헌법에 보장된 학술과 표현의 자유를 폭 넓게 보장한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법조계와 학계에서도 이번 판결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한 법조계 관계자는 "특히 학술적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는 대원칙의 걸림돌이 바로 명예훼손죄"라며 "며 "학문적 논쟁 등은 법정이 아닌 학계에서 다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측면에서 이번 판결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