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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서울 태평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법무법인 세종, 해외건설협회, 미국로펌 휴즈허바드앤리드가 주관한 세미나가 열렸다. 헤외건설리스크 관리 및 ISD중재를 통한 분쟁해결방안'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는 국내 건설업체 관계자 230여명이 참가했다. /사진제공=법무법인 세종 |
한국에서 ISD(투자자·국가소송)는 상당히 민감한 용어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을 거치며 ISD는 아귀와도 같은 외국 투자자들에게 국내 사법주권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는 올가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ISD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기업에게는 말도 안되는 않은 이유로 권리를 박탈당하는 일을 막아주는 소중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특히나 해외현장에서 고전하는 국내 건설업체들이 권리보호를 위해 ISD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지난 17일 서울 태평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법무법인 세종, 해외건설협회, 미국로펌 휴즈허바드앤리드(Hughes Hubbard & Reed) 공동주최로 '해외건설 리스크관리 및 ISD 중재를 통한 분쟁해결방안 세미나'에는 국내 주요 건설사 관계자 23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 중 다수는 해외현장에서 해당국 정부의 조치 등으로 인해 납기지연, 비용상승, 수익성 훼손 등의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ISD 제도의 의미와 주요 제소대상 사안, 쟁점 등에 대해 정리해봤다.
◇정부가 분쟁 당사자가 아니어도 투자유치국 상대로 제소
ISD는 투자자(Investor)가 투자유치국(State)을 상대로 제기하는 일련의 절차를 이르는 용어다. 투자 유치국 정부가 분쟁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투자유치국을 상대로 제소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기업이 △해당국 정부의 부당한 정책변경, 자산수용 등으로 △합리적 기대가 훼손돼 재산상 피해를 입을 경우 ISD를 활용할 수 있다.
단순한 계약위반으로 인한 분쟁은 상사중재나 상대국 법원을 활용한 재판을 활용해야 한다. 다만 해당 계약위반이 상대국 정부의 부당한 조치로 인한 것일 때는 ISD와 상대국의 사법시스템 모두를 활용할 수 있다.
세종과 휴즈앤허바드에 따르면 아프리카 한 국가에서 기업에 뇌물공여를 요구했다가 거절받았다는 이유로 사업면허 갱신을 거절한 건, 투자유치를 위해 국가가 미리 외국기업에 제안한 각종 세제혜택과 보조금을 나중에 일방적으로 철회한 건, 4%였던 수출세율을 20%로 인상해 기업의 수익성을 훼손시킨 건, 기업이 거두는 일정수준 이상의 수익에 대해 '초과이득세' 명목으로 고율의 과세를 매긴 건 등이 대표적인 ISD 제소대상이었다.
이같은 사례에서 투자자들은 ISD 제소를 통해 최종판결을 이끌어 내 손해를 배상받거나 ISD 최종판결 이전에 투자유치국과 합의를 이끌어냈다. 세종 해외건설분쟁 그룹의 정하늘 외국변호사(미국 워싱턴D.C.)는 "상사중재를 통한 분쟁해결이 승소가능성이 낮거나 불공정할 것으로 예상되면 ISD 중재신청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며 "투자자가 승소한 상사중재 판정을 상대국 법원이 부당하게 집행거부할 경우에도 ISD 제소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ISD 분쟁이 진행될 때 일반적으로 최종판정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3년에서 3년반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다수의 경우는 ISD 제소 직후 투자유치국과 투자자의 합의가 성사되기도 한다. ISD 제소 후 합의와 최종판결을 더해 투자자가 전부·일부 승소한 비율은 65%에 달한다는 게 세종 측의 분석이다.
◇건설·에너지 부문에서의 ISD사건비중 급증
글로벌 기업들이 ISD를 활용하는 사례가 급증하는 것과 동시에 건설·에너지 산업 부문에서의 ISD 제소건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세계은행 산하의 ISD 심판기구인 ICSID(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와 세종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ISD에 중재회부된 사건은 549건에 이른다. 이 중 52건이 지난해에만 제소됐는데 이는 1966년 ICSID가 설립된 이후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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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한 해 제기된 ISD 분쟁의 업종별 현황 /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
지난해 말까지 누적 제소건수 중 약 절반이 건설, 석유·가스·광물, 전력·에너지 분야 등 범건설업 관련 건이었다. 지난해 한 해 제소된 52건 중에서는 약 2/3이 건설분쟁이었다. 건설부문에서 이처럼 제소건수가 늘어나는 데에는 유가하락으로 인한 중동 산유국의 재정악화로 발주처와 건설분쟁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 스페인 체코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의 재생에너지 관련 정책변경으로 인한 ISD제소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 등이 이유로 꼽혔다.
특히 해외진출을 적극 독려했던 국내 건설업체들도 관련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평가다. 세종 해외건설분쟁 그룹의 김종우 외국변호사(미국 뉴욕주)는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진출이 본격화됐다"며 "종전에는 단순 시공업무 위주로만 사업이 진행되다보니 해외건설현장에서의 리스크는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국내 건설사들이 EPC(설계·조달·건설 등 종합건설사업) 계약 위주로 해외에 진출하면서 리스크의 범위와 규모도 크게 확장됐다"며 "현지주민들의 시위와 발주자의 설계변경요구,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법규변동과 바쁜 현장환경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더해져 예기치 못한 리스크가 발생해 프로젝트의 수익성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재정악화를 이유로 현재 진행 중인 미지급 공사대금을 일괄 5% 이상씩 삭감토록 하고 올해 발주예정인 예정공사대금도 축소토록 지시했다는 소식은 국내 건설사들의 시름을 깊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글로벌 국제분쟁 전문가들은 한국 건설업체가 제소할 ISD 제소건수가 급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전망을 내놓는다고 한다.
◇"ISD 제소가능 사안 여부 판별이 중요"
국가에 따라서는 ISD 제소가 가능한지 여부를 따질 필요가 있다. 만약 불리한 요구사항이 계약서에 이미 명시돼 있는 경우에는 투자유치국 국내 재판을 통해서든 ISD를 통해서든 구제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ISD 제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특별한 조건이 충족돼야만 한다.
예를 들어 투자유치국은 주권국가로서 필요시 자국의 정책을 변경할 권한을 가지지만 투자유치국이 외국인 투자자를 유인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특혜를 제안하거나 외자도입법 등 외국인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제공된 특혜를 일방적으로 철회하는 등 조치를 취할 경우 '합리적 기대'를 훼손시킨 행위로 판정돼 ISD 제소대상이 될 수 있다.
수주단계에서 예측치 못했던 요구사항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나 준공 이후 운영단계에서 투자유치국이 제안했던 최소구매약정 등 수익성 보장정책을 철회하거나 변경시키는 행위도 ISD 제소대상이 될 수 있다. 현지 진출 해외기업에 대해 자국민 고용비율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채우도록 강제하는 소위 사우디제이션(사우디 정부의 자국민 고용강화 정책)이나 자국 사정에 의해 일방적으로 환율·관세제도를 변경시킨 페시피케이션(아르헨티나 정부의 일방적 환율·관세제도 변경건)도 경우에 따라 ISD 제소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요건을 충족시켰다더라도 한국이 투자유치국과 양자투자협정(BIT)를 체결하지 않은 경우라면 ISD제소가 어려울 수도 있다. 다행히 한국은 전 세계 100여개국과 BIT를 체결해 사실상 전 세계 국가를 상대로 ISD를 제소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 다만 국가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는 투자의 정의나 투자적격 요건, ISD 제소요건 등에 차이가 있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제공법 이론에 대한 심도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도 물론이다.
한국이 아직 BIT를 체결하지 않은 나라나 BIT 만료 후 갱신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는 나라에 진출할 때는 해당국과 BIT를 체결한 나라에 자회사를 설립한 후 진출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다. 휴즈허바드앤리의 알렉산더 야노스 파트너 변호사는 "3국에 자회사를 설립해 진출할 경우 BIT를 기반으로 ISD를 제소할 수 있다"며 "다만 3국경유시 조세부담이 더 커지는 경우도 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BIT만 기준으로 투자결정을 내려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ISD 제소가 실효성이 있을까? 답은 "YES"
야노스 변호사는 "외국인 투자유치에 신경을 쓰는 나라일수록 ISD에 제소당하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며 "제소이유가 ICSID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되면 자국 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이 있을지, 투자자 유치에 불리할지 신경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ISD 제소 이후 승소를 하면 장기간이 소요되더라도 손해배상금을 받아내는 데는 무리가 없다"며 "다만 조기에 자금을 회수하려고 한다면 손해배상금 수령보험에 가입하거나 손해배상금 청구권을 시장에 매도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ISD제소 후 피소국의 보복조치가 우려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ISD 제소 후 해당국에서의 기업자산이 수용되거나 사업면허 갱신이 어려울지에 대해 100% 확실한 것은 없다"면서도 "매우 공격적인 행보를 취한 나라와의 ISD 분쟁에도 불구하고 사업면허가 안정적으로 유지된 사례가 다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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