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한국전력 서울지역사업소에서 직원들이 전기요금 청구서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뉴스1

주택용 전력 소비자들이 한국전력공사(한전)의 전기요금 부과체계가 부당하다며 낸 '누진제 소송'에서 패소했다.

소송이 시작된 지 2년여만에 나온 첫 판단인만큼 전국에서 진행 중인 관련 재판들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8단독 정우석 판사는 6일 법무법인 인강의 곽상언 변호사 등 주택용 전력 소비자 17명이 한전을 상대로 낸 전기요금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에서 원고패소로 판결했다.

이번 소송에서는 한전이 주택용 전기요금에 누진제를 적용한 전기공급약관이 약관규제법에 의해 무효가 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정 판사는 "한전의 주택용 전기요금약관이 약관규제법 6조에서 무효로 규정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반해 공정성을 잃은 약관'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며 "그동안 한전이 부과해 징수한 전기요금은 부당이득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공정성을 잃은 약관조항'으로 인정되려면 단순히 소비자에게 다소 불리하다는 점만으로는 안 되고, 약관 작성자가 거래상의 지위를 남용해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준 경우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 판사는 "전기요금 산정기준 등 고시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차등요금, 누진요금 등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해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며 "누진구간 및 누진율의 적정 범위나 한도 등이 규정돼 있지 않아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가 이 산정기준을 명백히 위반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전의 누진제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특정 소비자에 대해서는 요금계산을 달리 하거나 전기요금을 감액하도록 하고 있다"며 전기사업의 기업성과 공익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수준에서 이뤄졌다고 봤다.

11.7배라는 누진율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이례적으로 과도한 수준이라는 소비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각 나라의 전기요금에 관한 정책은 그 나라의 사회적 상화잉나 산업구조, 전력수요 등에 따라 다양하게 정해진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비자들은 "대부분의 국민은 한전과의 사이에 약관의 형식을 통해 전기를 공급 받는 것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 소비자가 구체적인 조항 내용을 검토할 기회도 없이 계약체결을 강요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정 판사는 "전기사업법상 공익사업인 전기사업의 합리적인 운용과 사용자의 이익보호를 위해 전기사업자와 수요자와의 공급계약에 대해 당사자가 개별적으로 계약조건을 협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고가 끝난 뒤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인강의 곽상언 변호사는 기자들과 만나 "결론을 상정해 논리를 맞춘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재판부가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 증거들은 한전이 재판과정에서 공개한 바 없는 내용이다"며 "항소하게 되면 청구금액을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소송을 낸 소비자들은 당초 1인당 최소 8만원부터 133만원까지 총 680여만원을 청구했다가 빠른 재판 진행을 위해 1인당 청구 금액을 10원으로 일괄 변경했었다.

한전은 정부의 인가를 받은 '전기공급약관'에 따라 전기요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 약관은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주택용 전기요금에 한해 누진제를 적용하는데, 총 6단계로 구분돼 사용량에 따라 요금 단가가 높아진다. 최저요금과 최고요금의 차이는 11.7배나 된다.

이 같은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는 전체 전력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용 전기요금에는 적용되지 않아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014년 8월 소비자 17명이 서울중앙지법에 낸 첫 소송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전국에서 진행 중인 누진제 소송은 총 10건이다. 법무법인 인강에 따르면 지금까지 소송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은 지난달 23일 기준 총 1만9920명에 달하며 요즘도 하루 평균 20~30명의 소비자들이 소송 접수를 신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