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사상 최초로 5월에 치러지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야말로 선거의 계절인 셈인데요. 최근 선거 관련 사건에서 법원이 잇따라 '교묘한 판결'을 내린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전에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 넘어온 경우 법원은 시간을 끌거나 부담스러운 쟁점을 피해간다는 비판에 종종 처했습니다. 최근에서야 불거진 논란은 아닌 것이죠.

법원은 왜 이런 논란의 도마에 오른 걸까요. 최종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과 하급심 법원 모두 비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대선 무효 소송, 각하까지 4년 3개월…"대통령 파면돼 소송 요건 사라져" 허무한 결론

대법원을 1심으로 하는 단심 사건인데 결론이 나기까지 무려 4년 3개월이 걸렸습니다. 시민 6644명이 참여한 '제18대 대선 무효 소송인단'이 "전자개표기를 사용한 18대 대선을 무효로 해달라"며 낸 소송 얘기입니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본격 심리를 거치지 않고 원고의 청구를 각하했습니다. 각하는 소송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심리를 거절하는 처분인데요. 소송 요건이 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소 황당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됐기 때문에 법률상 18대 대선 무효 소송을 제기할 근거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임기가 만료됐으니 소송 실익이 없다고 본 것이죠.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건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대법원은 헌법재판소 결정을 목 빠지게 기다리기라도 한 것일까요. 결론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 대목입니다.

공직선거법에서는 '선거와 관련한 소송은 다른 사건에 우선해 180일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접수된 이후 8개월이 지나 변론기일이 잡혔고 그마저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요청으로 기약 없이 미뤄졌습니다.

대법원은 2015년 1월 "여러 사건을 통일적으로 모순 없이 처리하기 위해 심층 검토 중"이라며 선고가 늦어진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2년이 훌쩍 지난 최근에도 "쟁점에 관한 재판부 논의 중"이라는 입장을 반복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소송인단 측은 선고 당일 기자회견을 열어 "관련법에 따라 이 사건을 먼저 처리해야 했는데 대법원은 4년 3개월간 심리도 없이 각하 결정을 내려 절차를 무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선거법 위반 벌금 80만~90만원형 대세…100만 원 이상이면 직 잃어

그런가 하면 최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턱걸이 선고'가 줄을 잇고 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당선무효형을 피하는, 80만~90만원 벌금형이 '대세'라는 건데요. 간당간당하게 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판결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당선인이 선거범죄로 징역이나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경우 그 당선이 무효가 됩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면 바로 자리를 잃는 것이죠.

한 예로, 지난해 20대 총선 과정에서 "손지열 (당시) 법원행정처장을 만나 서울동부지법의 광진구 존치를 약속받았다"는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기소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2심에서 모두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벌써 확정판결을 받은 이도 있는데요. 유권자들에게 배포한 의정보고서에 '과림동 일대 그린벨트 해제(571만여㎡)'라는 거짓 업적을 적어 재판에 넘겨진 함진규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벌금 90만원이 확정됐습니다.

1심과 달리 2심에서 극적으로 '기사회생'해 의원직 유지 판결을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총선을 앞둔 지난해 2월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지 않은 자원봉사자에게 100만 원을 건네 기소됐는데 2심 재판부는 벌금 3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벌금 90만 원으로 형량을 대폭 낮췄습니다.

이 같은 '턱걸이 벌금형'을 두고 "봐주기 선고가 줄줄이 이어지면 선거 범죄를 엄단 하겠다는 수사기관의 노력이 무색해진다"는 비판과 "법원의 꼼수가 아니라 혐의는 인정되나 직을 잃을 정도로 중대하지 않기 때문"이란 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장기화한 한명숙 전 총리 사건, 유무죄 판단 보류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도 논란

법원은 이전에도 정치·선거 사건과 관련해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기소 기점으로 5년1개월, 상고 이후 1년 11개월 만에 선고되면서 불거진 것입니다.

대법원은 당시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느라 선고가 지연됐다"고 설명했는데요, 공판기록은 2만2000페이지, 증거기록은 3만5000페이지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법리적 쟁점이 다른 형사 사건들에 비해 별로 복잡하지 않아 대법원의 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건인 만큼 정치권을 의식해 몸을 사린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습니다.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대법원 판단은 '교묘한 판결'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었는데요. 재판에서 증거로 제시된 이메일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유·무죄의 판단을 보류했습니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트위터 계정, 활동 내용 등이 담긴 파일입니다. 앞서 2심 재판부는 이 문서들이 '내게 보낸 메일함'에서 발견됐고 매일 반복적으로 업무상 필요에 의해 작성됐다고 봤습니다. 같은 증거를 두고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죠.

애매한 상태로 사건을 파기환송한 데 대해 "대법원이 현 정부에 부담이 될 수 있는, 어려운 판단의 책임을 서울고법에 떠넘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로써 원 전 원장 재판도 장기화한 상태입니다.

이같이 짚어보니 미심쩍은 판결이 한 두건이 아닙니다. 얼마 전 '법관 블랙리스트 파문' 등으로 내홍을 겪은 사법부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선거 관련 범죄가 다수 적발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향후 법원 판단을 지켜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