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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 아가씨가 지금 이 안에 있다니까"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2008년 개봉영화 '추격자' 스틸컷.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까지 선하진 않다. 한국영화에서 손꼽히는 스릴러 영화 '추격자'의 후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의 집에서 피투성이 모습으로 도망친 피해여성이 동네 슈퍼에 숨는다. 슈퍼 아줌마는 우연히 가게에 들린 단골손님 지영민이 연쇄살인범인 줄 모르고 피해여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 뒤 슈퍼를 지키겠다고 거짓말하는 지영민에게 망치까지 건네준다.

"어떤 미친 X이 멀쩡한 아가씨를 가둬놓고 죽이려고 그랬다지 뭐야. 그 아가씨가 여기 있다니까."

누적관객 500만명의 탄식을 자아낸 대사다. 선한 의도가 비극으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현실세계에서도 이런 경우가 흔하다. 정확히는 선한 의도가 선한 결말로 이어지는 순수한 선의 순환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폭행을 당하는 사람을 돕다가 되레 가해자로 몰리거나 좋은 의미로 했던 말이나 일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연이 인터넷을 잠시만 검색해봐도 넘쳐난다.

집단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다. 지난 정부가 2021년 7월 법정 최고금리를 20%로 내릴 때 정책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던 것은 선한 의도와 달리 저축은행의 저신용자 대출이 위축되면서 불법 사금융 피해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에 대비한 금리 인상이 현실화하면서 전문가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수익성이 악화한 저축은행들은 신용등급이 낮고 담보가 없는 이들에 대한 대출부터 멈췄다. 제도권에서 돈을 구하지 못한 저신용자 십수만명이 불법사채시장으로 달려갔다.

정책의 선의를 무작정 깎아내릴 순 없지만 당시의 정책이 '최선'이었냐는 질문 앞에 고개를 꼿꼿이 세우기는 면구스러울 수밖에 없다.

10년 전 정부가 공기업 부채비율을 낮추겠다고 했을 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정부의 선한 의지에 밀린 공기업들이 법인을 따로 설립해서 부채를 넘겼다. 이렇게 하면 장부상으로는 부채가 낮아지지만 실제 거래비용은 오히려 늘어난다. 선한 정책의 슬픈 결과다. 영화로도 나왔던 소설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의 김려령 작가가 쓴 또다른 장편소설 '일주일'에는 "선한 마음은 알겠으나 깊은 처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표면적으로는 헌법과 법률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23일 결론이 나올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논란을 두고 헌법재판소가 다룰 근본적인 질문도 바로 이 문제와 맞닿아 있다. 검수완박이 정의라고 외치는 국회도,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 복귀)이 정의라고 목소리 높이는 검찰과 법무부도 모두 국민의 안전과 기본권 보장이라는 선의를 내세운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잔혹한 것은 때론 이렇게 선의와 선의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선의의 결말이 어떤 것인지 미리 예상할 수 있는 관객들과 달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내일의 결말을 예측하지 못한다.

"그 아가씨가 지금 이 안에 있다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누구든 스스로를 돌아봐야지 않을까. 선의에 대한 과신은 악의에 대한 과신 못지않게 위태롭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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