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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인감과 위조인감증명서 등을 활용해 제3자가 본인명의의 계좌에서 돈을 편취한 사건이 있었다. 계좌주는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본인확인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결과는 금융기관이 은행인지 증권사인지 여부에 따라 달라졌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K사는 자사의 자금담당 부장 이 모씨가 위조인감 등을 사용해 A은행에 예치된 30억원 규모의 정기예금을 중도해지하고 K사 명의의 가짜계좌로 이체해 횡령한 데 대해 A은행에 피해금액의 절반인 15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K사는 1심에서 승소했다.
2012년에는 80대 노파인 김 모씨가 B은행을 대상으로 유사한 소송을 제기했다. 김 씨가 평소 인감도장에 비밀번호를 적어두고 있었던 데다 지인에게 현금인출 심부름을 종종 시켜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3자는 김 씨와 비슷한 나이의 노파를 섭외하는 등 방법으로 B은행에 예치돼 있던 김 씨의 예금 6억4600만원을 편취했다.
김 씨는 B은행이 본인확인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B은행을 대상으로 피해금액 전부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2심에서는 김 씨의 과실을 각각 30%, 70%를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김 씨의 전부승소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B은행은 김 씨에게 피해금액 전부를 물어줘야 했다.
금융기관이 거대화되고 그 기능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금융기관에 보다 엄격한 책임을 부과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앞서 살펴 본 A은행에 대한 K사의 소송이나 B은행에 대한 김 씨의 소송이 대표적이다. 제3자가 위계를 이용해 비밀번호와 인감, 인감증명서 등을 제시했다더라도 금융기관은 보다 엄격히 본인확인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하지만 유사한 사례이나 소송상대방이 증권사일 경우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앞서 나온 K사의 사례에서 자금담당 부장이던 이 씨는 A은행은 물론 C,D 증권사에서도 위조인감 등을 사용해 두 증권사에 예치돼 있던 K사 명의의 RP(환매조건부채권), ELS(주가연계증권), 채권 등 금원을 K사 명의의 가짜계좌로 옮기는 방법으로 편취했다. 이 씨가 이들 두 증권사에서 편취한 K사 명의의 금원은 220억원에 달했다.
K사는 C,D증권사에 본인확인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10억원씩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K사가 청구한 금액은 피해금액의 22분의 1에 불과했다. 하지만 K사는 양 증권사를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1,2심 모두 패소했다. 법원은 이 씨 요청에 따른 일련의 거래로 K사가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는 '표현대리' 또는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로 과실이 없다는 C,D증권사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표현대리'란 권한이 없는 대리인이라고 하더라도 일정조건을 충족하면 그 대리인(무권대리인)의 행위를 본인의 행위로 간주하는 법리다.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란 실제 채권자가 아니라더라도 채권을 사실상 행사하는 자로서 외관을 갖춘 자에게 채무자가 금원을 변제해도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법리다. 거래상대방을 보호하고자 도입되는 법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K사가 A은행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을 때 A은행도 C,D증권사와 마찬가지로 '표현대리' 또는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라고 항변하며 맞섰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김 씨가 B은행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을 때도 B은행이 항변사유로 든 것도 '표현대리' 및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라는 법리였다.
같은 법리에 대해 법원이 다른 판단을 내놓은 이유는 무얼까. 전문가들은 영업의 형태면에 있어서 은행과 증권사 사이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법원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앞서 K사와 김씨의 소송을 대리해 승소판결을 이끌어 낸 이충훈 변호사(법무법인 씨엠)는 "금융기관의 업종과 분쟁대상 상품이 다르고 상품별 거래실무도 모두 다를 경우 주문 및 매매체결, 자금이체 실무, 담당자의 관여정도 등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법적으로 요구되는 본인확인 의무의 태양(형식적 요건)이나 요구정도도 다를 수 있어 각 판결들이 모순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은행의 경우 정기예금은 가입 후 해지 전까지 기간에는 계좌주와 은행간 특별히 거래행위라 할 만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기 전 중도해지와 같은 행위는 매우 이례적이다. K사가 A은행에 가입한 30억원 규모의 정기예금을 만기해지하거나 80대 노파인 김 씨가 B은행에 넣어둔 6억4600만원의 예금을 자주 이용하지 않던 먼 곳에 있던 지점에서 중도해지해 별도의 계좌로 이체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어서 A,B은행의 본인확인 여부를 엄격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반면 증권계좌에서는(특히 법인의 경우) 자금운용 필요에 따라 수시로 금융상품의 매입·매수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K사의 이 씨 역시 10년 이상 C,D 증권사를 통해 K사의 자금운용 업무를 하면서 많은 상품의 매매와 그에 따른 입출금 거래를 해왔다. 이 같은 경우 모든 거래에서 고객의 의사를 대리인이 아니라 본인에게 엄격히 확인하는 것이 거래실무상 요구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거래실무상 일반기업이나 기관투자자들이 증권계좌에서 금융상품을 매매할 때는 증권사 직원이 유선통화로 간단히 비밀번호만 확인하는 경우도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같은 실무는 은행에서 비밀번호를 확인할 때 ARS(자동응답시스템) 입력을 사용토록 하는 게 대부분인 것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차이점들로 인해 법원이 A,B은행 때와 달리 C,D증권사에 엄격한 본인확인 의무를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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