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세관의 몰래카메라 부정수입 기획단속으로 압수된 몰카들. 적발된 몰카 종류는 볼펜, 라이터, 안경, 리모컨, 단추, 넥타이형 등 모두 생활 밀착형 제품이다. /사진= 뉴스1코리아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A씨는 밤 11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탄 유모씨. 생면부지의 그는 그녀를 향해 스마트폰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A씨는 사진을 찍혔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늦은 밤 단둘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A씨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CCTV를 통해 유씨를 잡았다. 그의 스마트폰에서는 지하철 등에서 찍은 여성사진 49장이 발견됐다.

늦은 밤 허락없이 쫓아가 사진까지 찍은 유씨는 법의 처벌을 받았을까?

유씨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2심 재판부는 유씨에게 벌금 100만원과 24시간의 성폭력치료프로그램교육 이수를 명령했다. 판결은 다시 뒤집혔다. 대법원은 이를 무죄로 판단, 사건을 돌려보냈다.

법은 하나인데, 결과는 매번 달랐다. 판사마다 '성적욕망'과 '수치심'의 기준을 다르게 봤기 때문이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는 '카메라 등을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해 촬영한 자'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2심 재판부는 "엘리베이터까지 쫓아가 촬영을 한 의도, 은밀히 이뤄진 촬영 경위 등을 종합하면 피해여성이 통상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남성의 성적 욕망과 의도에 의해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고 봤다. 유죄 판결의 이유다.

반면 대법원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관점에서 피해자의 옷차림, 노출의 정도, 촬영장소·각도·거리, 특정 신체부위의 부각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목 위를 제외하고 노출된 신체부위가 없으니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를 촬영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무죄 판결의 이유다.

하지만 대법원도 유씨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대법원은 "유씨의 행동이 부적절하고 A씨에게 불안감과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임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판결에 논란이 일자 대법원은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성범죄가 아닌 초상권 침해 등 민법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해명이다. 하지만 그 '객관'의 기준은 판사에게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판사들마저도 달랐다. 2심 판사들에게는 수치심을 일으킬만한 사진이 대법관들에게는 그런 사진으로 보이지 않았다.

'성적욕망'과 '수치심'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다. 이 주관적인 기준에 객관적인 잣대를 두기 어렵다는 재판부의 고충은 충분히 동감한다. 대법원은 객관적 잣대로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관점'을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주관적인 기준이다. 개개인 판사가 가진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관점이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정도는 괜찮지 않은가'라는 판사의 생각이 판단의 기준이 됐다. 어디서부터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일까. 늦은 밤 처음보는 여성을 쫓아가 몰래 사진을 찍고, 모르는 여성의 사진 49장을 보관한 사람을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사진을 찍은 의도와 상황, 사진을 찍힌 사람이 느낀 감정이 고려돼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판결 이후, 누군가 쫓아오며 몰래 사진을 찍어도, 노출 없는 옷을 입고 있다면 '몰카'로 처벌하기는 힘들어졌다. 똑같은 몰카도 겨울에 찍히면 무죄, 여름에 찍히면 유죄일 확률이 높아지는 상황이 된 셈이다.

이번 판결 결과가 나오자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이제 마음놓고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말인가' '내일 저도 몰카 찍을게요 감사합니다' '다 벗지 않은 여자가 더 섹시한데?' '노출이 적으면 몰카가 아니라고? 이게 법원에서 나올 소린가' 같은 글이 올라오고 있다. 판결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계량적으로 어느 수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조차 판결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심상철 서울고등법원장은 지난 7일 청소년 법률토론대회 개회사에서 법원의 재판에 대해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절차로, 당사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탄탄한 논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시선으로 보기에 얼마나 상식적이었을까. 성범죄를 바라보는 대법원의 시선이 아쉽다. 범죄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기준이 없다면 만들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