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균씨는 2001년 유언장을 작성했다. 땅과 건물의 차임채권, 즉 임대료를 받을 권리를 아내인 지현씨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이었다. 유언장에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00빌딩'이라는 영문주소가 인쇄(부동문자)돼 있었다. 상균씨는 2001년 사망했고, 서울가정법원에서 유언장 검인 절차가 이뤄졌다.

상균씨와 지현씨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 민우씨는 2007년 사망했다. 그런데, 유언에도 불구하고, 민우씨가 사망한 후 며느리 연진씨는 땅과 건물 임차인들에게 직접 세를 받았고, 이를 지현씨에게 주지 않았다. 시어머니인 지현씨는 며느리 연진씨를 상대로 부당이득금반환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1심과 항소심은 원고의 청구 등 일부를 인용했다. 피고인 며느리 연진씨는 이에 불복, 상고를 제기했다.

대법원 "유언장에 '자필' 주소가 없어…효력 없다"

대법원은 "유언장에 주소가 없어 법정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나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유언장에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00빌딩'이라는 영문주소가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대법원은 "유언장 용지에 영문 주소가 부동문자로 적혀있지만, 망인의 자필이 아니다. 유언장 전문에 여러 지번이 기재돼있지만, 각 지번이 적힌 위치, 내용을 보면 이는 유언의 대상이 되는 부동산의 지번을 적은 것일 뿐 망인이 자신의 주소를 적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망인이 자신의 주소를 적은 것으로 볼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민법 제1065조, 제1070조가 유언의 방식을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해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법적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뜻이라도 무효다(대법원1999.9.3.선고98다17800판결, 대법원2006.3.9.선고2005다57899판결 등 참조).

자필증서 유언은 민법 제1066조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모두 직접 적고 날인을 해야 효력이 있다. 유언자가 주소를 적지 않았다면 효력이 없다.

자필증서의 '주소'…본인 확인 위한 것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은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직접 쓰고 날인을 해야 한다(민법 제1066조). 이 사건은 이 중 주소를 적지 않은 경우다. 민법은 유언자가 주소를 자필로 적을 것을 요구하는데,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니 유언으로 효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주소 요건이 꼭 필요한지 의문이다.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에서 '주소의 자서'를 유효요건으로 정하고 있는 것은 유언자의 재산권과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하는지 여부가 문제가 돼 헌법소원이 제기된 적이 있다.

다수의견은 합헌이었다. 다수의견에 따르면 성명의 자서로 '유언자가 본인이 맞다'는 인적 동일성이 1차적으로 확인되겠지만, 예를들어 동명이인이 있는 경우라면 이름만으로 본인 확인이 어렵다. 이럴 때 유언자의 주소가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간편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또 전문, 성명에다 주소의 자서까지 요구해 유언자가 신중하고 정확하게 유언의 의사를 표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입법목적이 정당하다.

그리고 유언의 요식주의를 취하는 이상 유언자가 당연히 작성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유언의 전문, 유언자의 성명' 등과 같은 최소한의 내용 이외에 다른 형식적인 기재 사항을 요구하는 것은 유언의 요식주의를 관철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주소의 자서'는 다른 유효요건과는 다른 측면에서 유언자의 인적 동일성 내지 유언의 진정성 확인에 기여한다는 것이다(헌재 2008.12.26. 2007헌바128).

이사 빈번한 세상에…주소 요건은 삭제해야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에서 주소 기재를 요구하는 이유는 유언자의 인적 동일성을 명확히 해 유언자 사망 후 진의를 확보하고 상속재산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해 법적 안정성을 도모하고 상속제도를 건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유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유언자를 특정할 수 있는 요소는 주소 외에 주민등록번호·생년월일·본적·가족 성명·사회적 신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주소가 가장 우월하다고 보기 어렵다. 주소가 없으면 유언자를 특정할 수 없게 된다고 볼 수도 없다.

동명이인의 경우 유언자의 주소가 없어도 유언 내용 등을 보면 누구의 유언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주소를 반드시 기재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유언자의 인적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에 주소가 기재돼 있지 않더라도 다른 내용으로 유언자를 특정할 수 있다면 유효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에서 주소를 요구하는 입법취지에도 부합하고 유언자의 의사도 존중하는 길일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당시 헌법재판소에서 4인의 재판관은 다수의견과 달리 위헌 의견을 내놨다.

궁극적으로는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의 형식요건에서 '주소의 자서'는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번 정착하면 평생 동안 이주를 거의 안하던 농경사회에나 적합한 요건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어디에 사는 누구'라는 식으로 사람을 특정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특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거주의 이전이 빈번하고 같은 시기에 여러 주거지에서 생활할 수도 있다. 외국으로 이주하는 이들도 많은 글로벌 시대에서 주소라는 것은 한 개인을 특정짓는 데 별로 용이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유언의 내용으로 유언장 실제 작성자와 유언장 명의자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고, 유언이 그의 진의에 의한 것임을 충분히 밝힐 수 있는데도 주소를 반드시 기재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한 요건을 부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법무법인 바른의 김상훈 변호사는 43회 사법시험(연수원 33기)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다. 고려대에서 친족상속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의 상속법과 신탁법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주로 가사·상속·신탁·가업승계 등을 전문분야로 가족간 가족기업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이슈들을 상담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