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아더 존 패터슨(37)./사진=뉴스1

19년 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아더 존 패터슨(37)이 항소심에서도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윤준)는 13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패터슨에게 "범행 당시 상황 및 이후 정황에 비춰볼 때 패터슨이 에드워드 리(37)와 공모해 피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실을 합리적 의심없이 인정할 수 있다"며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징역 20년은 범행 당시 만 18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소년법의 적용을 받는 패터슨에게 선고될 수 있는 법정최고형이다.

재판부는 "혈흔과 당시 피해자의 상태 등 객관적 증거에 비춰보면 리의 진술은 논리적인 개연성에 특별한 문제점이 없는 반면 패터슨의 경우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논리적 모순이 있다"며 "상반되는 두 사람의 진술 중 리의 진술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는 "범행 이후 패터슨은 곧바로 자신의 옷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친구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범행현장을 빠르게 벗어나려고 했는데 이는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취할 것으로 기대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며 "이후 피가 묻은 옷을 태우고 칼을 버리는 등 범인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또 "리가 범인이라면 현장에 같이 있던 패터슨으로서는 억울한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패터슨이 친구들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며 "반면 리의 행동은 가해자가 아닌 목격자의 행동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 패터슨의 진술이 진실, 리의 진술이 거짓으로 나왔지만 그 결과가 항상 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며 "리의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다만 리가 패터슨에게 '아무나 칼로 찔러 봐'라고 말한 점, 범행 이후 친구들에게 범행사실을 과시한 점 등에 비춰 패터슨의 범행이 리와 공모해 이뤄진 사실은 인정했다.

아울러 "이 사건 범행으로 피해자는 아무런 잘못도 이유도 없이 22세의 나이에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며 "이로 인해 피해자의 가족도 큰 정신적 충격과 고통 속에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왔다"며 1심이 선고한 20년의 형량은 무겁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어 "패터슨은 그동안 범행을 자백하고 뉘우침으로써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범인 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날 선고를 지켜보러 온 피해자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주문을 읽어내려가자 이내 눈물을 훔쳤다. 선고가 끝난 뒤 어머니는 기자들과 만나 "진범이 밝혀져서 너무 좋다"며 "지난 19년동안 범인이 누군지도 몰라 항상 (아들에게) 죄 짓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간 밤낮으로 어떻게 진범을 밝혀 벌을 줄까 생각 뿐이었다"며 "이제 하늘에서 아들을 만나도 조금은 떳떳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19년 전 당시 검사가 잘못해 범인 두 사람 중 한 명을 못가리고 사건을 여기까지 끌고왔다"며 사법부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편 패터슨을 변호해 온 오병주 변호사는 "거짓말탐지기 반응에서 10번 모두 거짓 반응이 나온 진범을 대신해 10번 모두 진실 반응을 보인 패터슨이 살인범으로 지목된다고 해서 피해자를 위로하거나 사법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며 즉시 상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어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돼 실체적 진상이 규명되고 억울한 사람이 대신 처벌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사건은 1997년 4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패스트푸드 전문점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모씨(당시 22세)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되면서 불거졌다. 당시 검찰은 조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등을 근거로 에드워드를 살인, 패터슨을 증거인멸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1·2심은 모두 리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1998년 무죄 취지 판결을 내렸다. 이후 검찰은 재수사 끝에 2011년 패터슨을 진범으로 지목해 기소했다. 증거인멸 등 혐의로 수감됐다가 1998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패터슨은 이듬해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지난해 9월 강제 송환됐다.

1심은 "에드워드와 공모해 패터슨이 피해자를 흉기로 찌른 사실이 인정된다"며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공격한 경위, 피해자의 신체와 범행현장에 남은 혈흔 분석 등에 비춰보면 패터슨이 범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패터슨 측은 2심 재판 과정에서 다양한 증인과 현장검증 등을 신청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증인들은 대부분 연락이 닿지 않거나 불출석 의사를 표명했다. 특히 사건 당시 한 장소에 있었던 에드워드 리(37)는 1심에서 충분히 협조를 했다며 증인 출석을 거부했고, 에드워드가 나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재판부가 현장검증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패터슨은 지난달 9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이 사건은 누가 유무죄인지 따지는 것보다 중요 사건에 대한 희생양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며 "그 희생양이 내가 됐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호소한다"고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