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돈을 허락 없이 함부로 취득하면 형법상 죄가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돈을 취득하는 방식에 따라 절도죄가 되기도 하고, 공갈죄가 되기도 하는 등 성립할 수 있는 범죄의 명칭은 그때 그때 다르다.

이와 관련해 어떤 사람으로부터 현금을 대신 인출해달라며 카드를 건네받은 사람이 현금인출기에서 부탁 받은 금액 이상을 인출해 차액을 챙긴 경우,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한 대법원 판례(2005도3516)가 있어 눈길을 끈다.

PC방에서 일하던 A씨는 2003년 2월 오전 10시 쯤 게임을 하러 온 손님 B씨로부터 2만원을 인출해오라는 부탁과 함께 그의 현금카드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카드를 들고 현금인출기로 간 A씨는 마음이 바뀌어 2만원이 아닌 5만원을 입력해 인출한 뒤 그 중 2만원만을 B씨에게 건넸다.

이에 검찰은 A씨가 B씨의 돈을 절취했다며 A씨를 기소했다.

현금 인출기에서 부탁 받은 금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인출해 카드 주인에게 전액을 돌려주지 않은 죄가 형법상 무슨 죄에 해당하는지와 관련해 검사의 기소 과정에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대법원은 A씨의 죄가 컴퓨터등사용사기죄(제347조의2)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예금주인 현금카드 소유자(B씨)로부터 일정한 금액의 현금을 인출해 오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이와 함께 현금카드를 건네받은 것을 기화로 그 위임을 받은 금액을 초과해 현금을 인출하는 방법으로 그 차액 상당을 위법하게 이득할 의사로 현금자동지급기에 그 초과된 금액이 인출되도록 입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초과된 금액의 현금을 인출한 경우에는 그 인출된 현금에 대한 점유를 취득하게 되므로 그 인출한 현금 총액 중 인출을 위임받은 금액을 넘는 부분의 비율에 상당하는 재산상 이익을 취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봤다.

이런 법리에 따라 법원은 A씨가 인출한 차액 3만원 부분에 관해 현금인출기라는 정보처리장치에 권한 없이 정보를 입력해 정보처리를 하게 함으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 판결 팁 = 위 사례에서 검찰은 A씨를 ‘절도죄’로 기소했었고, 검사의 기소 내용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게 되는 법원은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절도죄'에서의 절취란 재물 점유자의 의사에 반해 그 점유자의 지배를 배제하고 자신의 지배로 옮겨놓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현금카드를 절취한 때와 같이 현금카드 자체를 사용할 권한이 없는 경우와 달리 A씨는 예금명의인인 B씨로부터 그 현금카드를 사용할 권한을 일단 부여받았고, 그 기회에 부탁 받은 위임 범위(2만원)를 벗어나 추가로 금원(3만원)을 인출한 경우다.

이런 경우에 현금자동지급기 관리자는 예금명의인 B씨의 통장에서 인출자 A씨에게 적법하게 현금을 지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금자동지급기 관리자에게 B씨와 그로부터 현금 인출을 위임받은 A씨 사이의 내부적인 위임관계까지 관해 그 위임받은 범위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그 인출행위를 승낙하지 않겠다는 의사까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A씨의 현금인출 행위가 현금자동지급기 관리자의 의사에 반해 그가 점유하고 있는 현금을 절취했다고는 볼 수 없어 절도죄는 아니라는 의미다.

◇ 관련 조항

- 형법

제347조의2(컴퓨터등 사용사기) 컴퓨터등 정보처리장치에 허위의 정보 또는 부정한 명령을 입력하거나 권한 없이 정보를 입력·변경하여 정보처리를 하게 함으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취득하게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